봄을 시샘한 겨울이 한바탕 심술을 부려 꽃피고 새가 우는 춘삼월에 큰 눈을 퍼부어 속세는 춘설대란이라고 난리 통입니다만 산을 찾는 우리들에게는 더없이 감사한 선물일수가 없습니다. 폭설이나 폭풍 등의 악천후 때는 우리 산사람들의 보금자리 셰난도어는 빗장을 걸고 입산을 금지시키는 일이 다반사인데 211번 도로를 따라 진입하는 Thonton Gap 공원 출입구에서 퇴짜를 맞고 서운한 발길을 돌려야 할 경우에는 메리스락으로 오르는 파노라마 비지터 센터 아래쪽 주차장에서 산행을 시작하는 예가 많습니다. 아니면 아예 산 아래 공원 안내 표지판이 있는 곳에서 시작하는 Buck Ridge 트레일이나 Buck Hollow 트레일을 타고 메리스락 정상으로 오르거나 이 구간 왕복이 다소 힘이 든다면 스카이라인 정도를 밟고 돌아오기도 합니다. 또 하나 워싱턴 산객들이 자주 선택하는 길이 입구를 향하여 굽이굽이 고개를 오르기 시작할 즈음 눈길이 미끄러우면 그만 오르고 시작하는 패스 마운틴 트레일 입니다. 이 길은 적당하게 등고선을 좁히며 오르다 일차 정상격인 셸터 까지 오른 뒤 계속 연결된 에팔레치안 트레일 중 취향대로 남향이든 북향이든 선택해 더 걸으면 됩니다. 그 날의 상황에 따라서 혹은 참가자들의 역량에 따라서 조정할 수 있으니 아무래도 마음의 여유가 생기는 길이기도 합니다. 겨울이 제 아무리 심술을 부리며 버티어도 눈 속에서 태동하는 봄의 기운들과 우리들 가슴속에서 피어나는 따스한 봄을 기다리는 마음은 어찌 할 수 없는 신의 섭리. 오늘 그 길을 따라 봄을 맞이하러 패스 산을 오르려합니다.
자연이 한수 던지는 교훈.
눈이 덮여 길이 없는 길. 콘크리트 기둥의 이정표를 더듬어 산길을 오릅니다. 시즌이 지났다고 배낭 속 깊이 두었던 아이젠을 다시 찾아 미끄럼을 방지하도록 단단히 조여 매고 당찬 발길 내딛습니다. 처음부터 가파르게 시작되는 등산길, 일주일 만에 찾은 몸이 미처 적응을 못하고 가쁜 숨만 몰아쉬게 합니다. 산에서는 물리적 나이를 뭇지 말고 건강나이와 신체나이만 말하라 했던가? 육순을 훨씬 넘긴 분의 발길이 일행을 리더하고 있습니다. 언제 그리 많은 눈을 뿌렸던가 하면서 하늘은 짐짓 모르는 척 화창한 기운을 가득 산에 채워놓았습니다. 봄볕이 녹여주고 바람이 털어주니 빈 가지에 환하게 피었던 눈꽃들은 어느새 지고 말았고 물오른 가지 사이로 메리스락의 정상이 지척에 머뭅니다. 그 모진 겨울을 견뎌온 사철 푸른 산철쭉의 마른 잎에도 이제는 성긴 물이 올라 더욱 윤이 흐르고 있습니다. 아무도 밟지 않은 그 눈길 위에 우리의 발자국을 남기며 걷는 일은 자못 신나는 일입니다. 까닭 없이 우쭐해지기도 합니다만 오래 지나지 않아 사슴들의 족적을 만납니다. 그네들도 이렇게 눈이 쌓여 인적이 드물면 그 잘난 인간의 길을 편하게 걷고도 싶었겠지요. 가족들이 나들이 나섰는지 다소 어지럽게 발 도장을 찍어놨습니다. 겨울을 지낸 이른 봄 산은 마치 열병을 앓고 난 환자처럼 무척 수척합니다. 그래서 더욱 안쓰럽고 연민의 정 까지 들게 하여 살포시 안아주고 싶은 마음입니다. 바람과 눈과 비가 헝크러놓은 무질서한 산을 치유의 자연은 느리지만 계절에 뒤지지 않게 하려는 듯 쉬임없이 다독거려 주고 있습니다. 곳곳에는 지난 날 내렸던 폭설에 이기지 못하고 많은 수목들이 그 아픈 생가지가 찢겨진 채 처절하게 누워 있습니다. 정말 아름드리나무 하나는 주 가지가 처참하도록 찢겨져 길을 가로 막고 있었는데 자연의 경악스런 현상에 전율마저 일게 합니다. 저렇게 비참하게 한 것은 설한의 거센 광풍도 삭풍이 멈추지 않는 혹한도 아니었고 단지 부드럽게 내리던 하얀 눈이었습니다. 무게조차 느끼지 못할 그 작은 입자의 눈들이 하나둘 쌓여서 엄청난 무게를 만들어내 그 우람한 나무들이 견뎌내지 못하고 가지가 찢기고 넘어져버리니 믿겨지지가 않습니다. 은근함과 차분함 속에서 쌓이고 모이는 그 작지만 가공할 힘.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한수 던지는 교훈입니다.
얼마나 그리우면 그랬을까? 연리목과 연리지.
일차 정상격인 셸터에 당도하였습니다. 2140마일 장대한 에팔레치안 트레일을 종주하는 산객들의 휴식과 숙면을 위해 평균 12마일 간격으로 AT 길에 지어둔 아담한 셸터 앞에는 식사를 위한 나무 테이블이 고즈넉하게 놓여있습니다. 다들 그 탁자에 땀으로 슬고 앉아 바라보는 하늘에는 뭉게구름 하릴없이 피어오르니 그 평화로운 풍광 속에서 한 구성이 되어 한낮의 나른한 간식과 휴식을 즐깁니다. 셸터 주변에는 반드시 생리현상을 해결할 해우소가 제주도 똥 돼지 간처럼 준설되어 있고 약수에 버금가는 수질 좋고 정갈한 샘터가 원칙처럼 붙어 있습니다. 당연히 하루 밤을 유하는데 밥 짓고 세면할 물이 있어야 하고 또 먹은 만큼 버려야 하는 곳이 있어야 하겠죠. 그 아늑한 구조가 더욱 정겹게 여겨집니다. 여기 샘터는 거의 산 정상에 가까운 지점인데도 어디서 녹아 있다가 흘러나오는지 그 양도 인색하지 않게 풍부히 품어주니 차라리 불신의 시대에 만들어진 산물의 하나인 병물을 부어버리고 그 청정 약수를 대신 담습니다. 이 약수는 우리 워싱턴 산사람들에게는 물맛이 좋기로 정평이 나있는 명물이기도 합니다.
해갈하고 시장기를 잠시 속인 뒤 눈을 들어보니 바로 지척에 특이한 나무 한그루가 섰습니다. 두 그루라 하기에도 한그루라 하기에도 묘한 그런 나무입니다. 산행을 하다 간혹 이런 나무들을 보는데 전혀 다른 두 그루의 나무들이 아예 통째 붙어서 한 나무가 되어 버린 것을 연리목이라 하고 가지만 서로 만나 붙어버린 것을 연리지라 합니다. 얼마나 그리우면 그랬을까 하는 그 애틋한 사랑을 기리면서 다들 그렇게 이름 지어 주었다 합니다. 그런데 이 나무는 연리목이었다가 다시 자라면서 이별을 하고 그래도 아쉬워서 가지가 다시 붙어버린 연리지의 복잡한 구조입니다. 어쩌면 한 커플의 사랑의 역사를 보여주는 듯 서로 다른 남녀가 만나 하나가 되어 살다가 마음이 맞지 않아 헤어진 뒤 그래도 그립고 못잊어 손이라도 잡고 있는 형태. 오늘날 다양하게 일어나는 부부관계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듯해서 그만 실소를 금치 못하고 말았습니다. 한번 연을 맺은 사랑 이별 없이 영원할 수 있다면 하는 탄식에 심호흡을 한번 하고 다시 길을 떠납니다.
길 끝에 서면 모든 것이 아름답습니다. 발아래 펼쳐지는 풍광이 그렇지만 지나온 내 길을 다시 돌아보면 그 길마다에 새겨진 발자국과 땀과 나와 서로 주고받았던 대화와 이렇게 살아야 하겠다는 새로운 각오들이 담겨있어 더욱 그렇습니다. 어쩌면 이제는 더 고생스럽게 오를 길이 없기에 평안해진 마음이라 더 그런지도 모릅니다.
버리고 비운다는 것은
겨울산은 한 폭의 수묵화 같습니다. 벗은 나목들 사이로 하얀 눈이 채워지면 더욱 그렇습니다. 그래서 나도 마음의 화선지를 활짝 펴놓고 붓을 놀립니다. 갈기를 세워서 달리는 능선에 몇 그루 헐벗은 나무를 그리고 여기 까지 올라왔던 가파른 오솔길도 그려 봅니다. 산 아래 유장하게 흐르는 시냇물도 그려 넣고 옹기종기 모여 사는 촌가의 아늑함도 채워봅니다. 이제는 하늘을 그려볼 양 푸른 시공을 노려봅니다. 구름으로 채울까 바람으로 채울까 선택에 골몰하다가 문득 차라리 빈 하늘 그대로면 어떨까하고 생각이 미칩니다. 빈 산 빈 하늘. 버리고 나니 마음도 흡족해집니다. 버리고 비운다는 것은 결코 소극적인 삶이 아니라 어쩌면 지극히 지혜로운 삶의 선택이며 새로운 것이 채워질 기회를 부여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저 오늘은 빈 하늘처럼 언제나 여백으로 비어 있는 것이 아니라 잠재적 본질과 실상을 떠받쳐주고 있어 언젠가는 내가 꿈꾸는 것들이 채워지지 않을까 하고 소망도 해봅니다. 사람은 올 때보다 떠날 때가 더 아름다워야 한다고 합니다. 마지막 옷깃을 여미며 뒤 돌아 설 때 많은 여운을 남길 수 있는 자신이 되어야 한다고 다짐해봅니다. 아무리 겨울이 시샘을 하여 광기를 부려도 변함없이 봄은 오듯이 내가 하루하루 살아야 할 삶의 시간도 변함없이 흘러가는 것. 그 순간마다 충실하며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것이 가장 아름다운 길의 끝으로 가기 위함이 아닐까하고 생각해봅니다. 이즈음에서 이제는 한기라고는 하나 없는 훈풍 한 자락이 어서 하산을 하라고 말하더니 휑하니 지나갑니다. 하늘은 어느새 더 맑아져 있고 사방이 빛으로 환하게 펼쳐지는 천국같은 봄날의 한나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