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키 변방의 보석 글레이셔 아보트 트레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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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연한 아침 햇살이 떠오르면 비로소 로키는 본연의 빛깔을 드러냅니다.
눈길 닿는 곳 어디라도 천연의 색으로 다가오는 로키의 아침.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이 생생하고 선명하게 자신의 삶을 색으로 풀어놓는 계절.
눈이 녹고 신록이 더해가고 꽃들이 만발해가는 여름이 웅장하면서도 아기자기하고 거칠지만 순수해 다가서면 설수록 더욱 매력적인 땅입니다.
짧디 짧은 로키의 여름은 그 단명을 열정으로 불태웁니다. 그냥 실없이 눈길 한번 던지면 로키는 그저 침엽수와 바위,
만년설과 푸른 하늘 그리고 하얀 구름으로 만 채워져 있습니다.
물론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치명적인 아름다움을 발산하는데 그 로키의 깊은 속살로 파고들어 눈높이에 맞춰 바라본다면 세상 경이의 초현실적인 산하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처절하게 이어가는 로키의 생명체들. 그 고독하고도 모진 삶의 투쟁을 존경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낙엽송이 무수히 펼쳐진 계곡 발아래는 들꽃 산꽃들이 지천입니다. 온 몸에 부딪히는 바람의 느낌부터가 달라지는 곳.
신이 연출한 대자연의 파노라마.
문득 경건한 마음으로 자세를 가다듬으면 자연과 신에 대한 외경심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런 느낌을 듬뿍 안고 오르는 길이 로키 4개 국립공원 중 서쪽 변방에 있는 글레이셔 국립공원이 품은 아보트 릿지 트레일입니다.
이 캐나다 글레이셔 빙원은 그대로 로키의 젖줄을 따라 국경을 넘어 미국 몬타나 주로 이어집니다.
그 장대함은 감히 필설로 표현이 어려운데 글레이셔 국립공원만 두고 저울질할 때는 모두가 스스럼없이 미국 글레이셔가 더욱 웅대하고 장엄하다고
평을 합니다만 오늘 오르는 이 길 끝은 캐나다 글레이셔 국립공원이 발산하는 미의 진수를 그대로 보여주는 수려한 곳입니다.
반프 지역에서 200킬로미터 가까이 서쪽으로 이동해야 다다를 수 있는 곳이라 허접한 산객들은 존재도 모르는 곳이고 또 욕심이 난다 해도
그 머나먼 곳으로 당일로 다녀오기란 쉽지가 않은데 우리는 기어코 그 생경한 자연을 접하러 이른 아침부터 달려갑니다.
캐나다 동서 횡단 1번 고속도로를 타고 시원하게 달리다 브리티시 컬럼비아 주의 Selkirks 산맥에 들어서서 힘겹게 Rogers pass를
넘으면 광활하게 펼쳐지는 글레이셔의 웅장한 풍광. 여기에서 산행은 시작이 됩니다.

도로 갓길에 나있는 주차장에서 출발하면 소방도로를 따라 몸을 풀다가 이내 역사적 유적지를 만나게 됩니다.
글레이셔 하우스. 레이크 루이스의 샤토우 호텔과 쌍벽을 이루며 19세기 후반부터 몇 십년간 캐나다 로키의 아름다운 호텔로서 일반 여행객뿐만 아니라
산악인들의 베이스캠프로도 각광을 받았으나 모진 자연과의 투쟁에서 결국은 패하고 참혹한 역사의 현장만이 남아있습니다.
인간의 끝없는 자연과의 각축은 그 험준한 글레이셔 국립공원을 관통하는 도로와 철도의 부설에서 시작되는데 철도는 엄청난 적설량과
눈사태 등을 피하기 위해 기나긴 터널을 뚫고 눈사태 차양을 만들고 심지어는 너무도 가파른 사면에 철길을 내자니
불가능해 용수철처럼 꼬이게 하는 Spiral Tunnel 까지도 창조해내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한계는 자연의 위대함에는 미치지 못하는 법. 결국은 잦은 사태와 철길의 소실 때문에 정상 운영이 어려웠고
설상가상으로 호텔 건물이 화재로 전소한바 찬란한 영광을 뒤로 하고 역사의 뒷장으로 사라졌다 합니다.
그러나 북미 산악 개척의 본산으로서의 그 명성은 아직도 화려한데 이 글레이셔 하우스에서 이름 꽤나 날리던 유럽의 산악인들이 기거하며
캐나다 로키 산악 지대의 개척 역사를 써온 곳입니다.

애잔한 마음 쓰다듬고 오른쪽 비탈로 난 길로 접어들어 본격적인 산행은 시작됩니다.
이곳 글레이셔는 거의 360도를 돌아가며 연봉들이 포진해 있어 수없이 많은 산봉으로 가는 길이 닦여져 있는데
당일 코스로 이 에보트 릿지 트레일이 세인들에게 각광을 받는 이유는 비록 산정에 오르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날카로운 릿지에
서서 시야에 가득 차는 병풍 같은 로키의 설봉들의 연이음을 가슴으로 감상할 수 있어 그렇습니다.
비탈진 사면을 3 킬로미터 오르면 소담스런 마리온 호수가 나오는데 그곳 까지는 그저 짙은 숲 그늘에 안겨서 가끔씩 감질나게 보여주는
설산의 풍경을 보며 정상에서 펼쳐질 장대한 모습을 그리며 가는 길입니다.
여독은 풀리지 않았고 반가운 마음에 동이 틀 때 까지 가진 친교의 장이 부족한 수면을 야기 시켜 발길이 묵직합니다.
하지만 이럴 때마다 떠올리는 생각. 정상에 서있는 나의 모습. 그리고 그 정상이 주는 정다운 보상.
눈으로 확인하는 풍경보다 마음으로 읽는 풍경이 더 아름다울 때도 있기에 미소를 지으며 사면을 오릅니다.
좁게 닦아진 등산로 외에는 빽빽하게 들어찬 나무와 꽃과 숲들.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거대한 고사목들이 곳곳에 쓰러져있고
아름드리 측백들은 유난히 기나긴 겨울 동안 지독한 적설량에 견디지 못하고 모두 어께를 축 늘어뜨리고 있습니다.
가지들이 하늘을 향하지 못하고 땅으로 처져 있는 모습은 참으로 안쓰럽습니다.
나무에 붙어서 공존하는 이끼류인 라이큰(Lichen)은 대기가 오염되면 더 이상 자라지 않기 때문에 자연의 청정함을
가늠하는 척도인데 겨울 설산 상고대처럼 모진 바람에 흩날리다 붙어버린 듯 몽환적인 풍경을 자아내며 우리를 반겨줍니다.
뒤처지는 일행을 기다리고 격려하며 드디어 호수에 다다랐습니다. 소담스레 티 한 점 없이 맑고 정갈한 호수.
나지막한 숲으로 둘러싸이고 멀리는 설산 고봉들이 두른 명당. 자연이 주는 모든 아름다움을 한곳에 품고 있습니다.
잠시 풍경을 감상하며 갈증을 해소하고 우리를 부르는 정상을 향해 전진 합니다.

더없이 정겨운 천연 돌계단을 밟으며 다리에 힘을 주어 고도를 높이니 점점 나무들은 키를 낮추고 시야는 트이면서
화려한 풍경들이 펼쳐지며 땅에는 앳된 얼굴로 아는 척하는 야생화들이 가득한 목초지로 들어섭니다.
한 고개를 넘으면 더 높은 능선이 나타나고 한 비탈을 오르면 또 산이 솟아오르니 시야는 점점 찬란한 아름다움으로 가득 채워집니다.
산은 한발 한발 힘겹게 띠며 오르는 우리들을 실망시키지 않고 하나둘 비경들을 풀어내 놓습니다.
밑에서 보니 이제는 아주 가까워진 설산을 배경으로 걸어가는 동료들의 발길에 닿는 땅과 하늘의 선이 참으로 미려합니다.
마치 신선이 가벼운 발걸음으로 운산을 오르는 듯 신비로움도 더합니다.
이제 완사면으로 접어들어 한 시름 허리 펴고 놓을 때 산정의 한 모서리에 아담하게 자리한 캐빈 같은 기상 관측소.
자연과 인공물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는데 그 주변에는 모진 생을 이어온 억새들이 숫제 아직도 그 누런빛을
벗지 못하고 빙하수의 흐름에 길들여져서 길게 누워있습니다.
옥구슬 구르듯 소리 내며 흐르는 맑은 물줄기 옆에 앉아 담궈두면 이내 시원해지는 맥주 한잔으로 정상주를 나눕니다.
로키의 변방 글레이셔의 한 정상에 올라선 것입니다.

단 몇 초도 견딜 수 없는 시리디 시린 개울물에 불난 듯한 발을 담그다 화들짝 놀라 고개 들어보니
이제야 어께를 나란히 맞댄 봉우리들이 물결치듯 흐르는 대자연의 파노라마가 눈에 들어옵니다.
어디서나 정상이 그렀듯이 황량하지만 시야를 가리는 것이 없어 조망이 일품이지요.
유난히 뜨거운 로키의 이번 여름은 두터운 빙하들을 제법 녹였고 일러실러위트 빙하에서 흐르는 물은 계곡으로 모여 폭포를 만드는데
그 내리는 모습이 양손의 손가락처럼 퍼져 있어 Finger Falls 군이라 이름 붙여 줍니다.
인간의 아름다움은 세월이 흐르면 그 빛이 바래지지만 자연은 그 세월을 쌓고 쌓아 장구한 멋을 더합니다.
우리는 눈길 주는 곳마다 명장면이 연출되고 발길 돌리는 곳 마다 명소가 되는 이 태고의 신비를 간직한 그 대자연의 신비 앞에 섰습니다.
몽블랑의 마터호른을 연상케 하는 주봉 도널드 산이 선봉에 서고 서쪽엔 바니 빙하가 동쪽에는 드넓은 일러실러위트 빙원이
그리고 북쪽에는 깊게 패인 쿠거 협곡이 도열하면서 글레이셔의 최고 조망처로서 소임을 다합니다.
이처럼 보이는 이를 압도 해버리는 로키의 설산 풍경. 대자연이 빚어낸 아름다움의 극치.
이 오묘한 자연의 조화를 세상의 어떤 단어로 표현할 수 있을까? 산정에서 느끼는 이 성취감과 대단한 자부심은 그 동안 주눅이 든
내 삶을 치유하기에 충분하며 이 로키의 애틋한 풍경하나 가슴에 담고 살아간다면 팍팍한 이민자의 삶도 달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 순간 이 풍경은 내 가슴에서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것이기에 그래서 살면서 자꾸만 들추어내는 추억 때문에 불현듯 로키를 그립게 만들어 버립니다.
다시 찾은 캐나디언 로키. 선험자들의 영령들이 죽비를 치며 나로 하여금 이 산을 오르게 한 오늘.
또 다시 로키의 품에 안겨 새롭게 마음의 치유를 얻고 산이 가르쳐준 대로 결코 서두르지 않는 삶을 살 것이라는
세상 두려움이 없는 자신감을 가슴에 가득히 채우고 돌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