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그러움

그녀가 흰 봉투 하나를 불쑥 내밀며 “아이고! 이런 게 왔는데 이게 뭔지 읽어보고 그곳에 연락해서 무슨 일인지 알아봐 줘”라며 한마디를 던지고 자리에 털썩 앉는다. 예고 없이 찾아든 손님, 나는 흰 사각봉투를 들며 “이게 뭔데요?”라고 묻자 “나도 모르니까 이렇게 왔지, 알면 내가 왜 여기까지 왔겠어?”라며 나를 바라본다. 봉투 안의 내용을 읽고 있는데 “뭐라고 썼어? 그게 뭐야?”라고 말하는 그녀에게 편지 내용에 관해 설명하자 “그래? 그럼 빨리 거기다 전화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아봐 줘.”라고 말하는 그녀는 내가 마치 자신의 종인 양 계속 반말을 하고 있었다. 그녀의 요구에 그곳에 전화하여 편지 내용을 설명하고 질문하고 전화를 끊고 그녀에게 결과 보고(?)를 하자 “알았다.”라는 말 한마디를 남기고 훌쩍 문을 나선다. 그리고 며칠 후, 그녀가 다시 또 불쑥 나타나 다른 봉투를 내밀며 “이런 게 또 왔어. 이게 또 뭐야, 귀찮아 죽겠네.”라며 봉투를 내민다.

 

나는 그녀의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그러자 그녀가 “왜? 내 얼굴에 뭐가 묻었어? 왜 그렇게 쳐다봐?”라며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제가 이런 말씀 안 하려고 했는데 왜 자꾸 나에게 반말을 하세요?”라고 하자 “내가 그랬나? 미안해요.”라고 하는데 별로 미안해하는 표정이 아니다.
그녀가 “앞으로 무조건 나에 대한 것들은 모두 책임지고 알아서 해결해 주세요. 내가 영어도 잘 모르고 편지가 와도 무엇인지 알 수가 없어요. 그러니 책임지고 나의 모든 일을 맡아서 해결해 주세요.”라고 한다. “저희가 도움을 드릴 수는 있지만, 아무 때나 오시고 또 전화하셔서 무조건 지금 당장 일을 해결해 달라고 하는 것은 좀 곤란합니다. 도움받으실 일이 있으면 시간 약속을 하시고 찾아오십시오.”라고 했을 때 그녀가 “어찌 되었든, 그러니까 내 일은 무조건 책임지라고 했잖아요?”라며 불쾌한 심사를 털어놓는다. 과연 내가 왜 그녀의 모든 일을 책임까지 져 가면서 해야 하는지 이해하기 어렵지만, 나는 그녀의 제안을 한마디로 거절한다.

 

우리가 그들의 어려움을 왜 모를까마는 우리가 해 줄 수 있는 일은 그들을 위해 도움을 줄 뿐이지 그들의 모든 일을 책임지고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또한, 사람을 만나고 헤어지는 일은 늘 약속이 있어야 한다. 그들만을 위해 대기하고 있는 택시 운전자도 아니고 비서도 아닌데 그들은 무작정 찾아와 무슨 도움을 청하면서도 문을 들어서는 그 순간 어떤 일이 있어도 지금 당장 그 일을 해결해 주어야 한다는 생각하고 있다.

 

전에 어떤 젊은 여인이 번역과 함께 공증을 요구했다. 번역할 서류는 Fax로 보내왔는데, 서류에 있는 내용 중에 한문이 많았다. 웬만한 것은 대충 해결해 놓았는데 어떤 한자는 알아볼 수가 없어 전화를 걸었다. “김 아무개 씨 부인 성을 알 수가 없는데 성이 무엇인지요?”라고 물으니 “나도 잘 모르지, 그냥 대충 알아서 써, 그래도 되잖아?”라고 했다. “그래도 번역을 하는데 대충 알아서 쓸 수는 없지요. 그러니 성을 알아서 알려주세요.”라고 하자 “그걸 내가 어떻게 알겠어, 나도 모르는데, 그러니까 대충 써도 미국사람들은 모를 거니까 그렇게 써”라며 계속 반말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왜 반말을 하세요? 그리고 엉터리로 대충 알아서 쓸 것 같으면 당신이 갖다가 대충 쓰면 되겠네.”라고 하자 그녀가 당황했는지 “아니 그게 아니라 저도 모르는데 어떻게 해요?”라고 한다.

 

언제부터 우리는 언어에 대한 예의를 잃어버렸을까? 대부분 사람은 별로 잘 알지도 못하는데 대뜸 “그랬어?” “알았어?”라고 말한다. 그래서 가끔 “왜 저에게 반말하십니까?”라고 물으면 “만만해서 그렇다.”라고 한다. 그래서 “제가 왜 그리 만만하십니까?”라고 물으니 “봉사하는 사람이니 그냥 너그러울 것 같다.”라고 한다.
그러나 너그러운 것도 한도가 있는 것이지 맨날 너그러울 수는 없다. 우리는 너그러운 것이 아니라 너그러워지려고 노력을 하고 있을 뿐이다. 무언인가가 필요할 때는 두 손까지 싹싹 빌며 도움을 청하지 않더라도 말에 대한 예의만은 지켜주었으면 정말 좋겠다. 우리는 그들을 위해 서 있는 봉사자일 뿐이지 그들의 종은 아니다. 그러나 설령 종이라 할지라도 예쁘고 아름다운 말과 미소의 만남이라면 더없이 좋은 만남이 이루어지지 않을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