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수와 같은 세월

어린 시절을 시골에서 보낸 나에게 추억이 하나 있다. 물론 더 많겠지만, 약 30여 가구가 살던 그곳에 가끔 우체부 아저씨가 오는 날이면 우리 집은 잔칫날이 되었다. 그 당시엔 글을 모르는 사람이 있어 편지를 받은 동네 사람은 저녁때가 되면 편지를 들고 아버지를 찾았다. 그리고 그들의 한쪽 손엔 편지가 들려 있었고, 다른 한 손엔, 막걸리나 국수 또는 달걀 한 줄이 들려있기도 했다. 아버지는 편지를 읽어 주고 답장을 해 주고, 어머니는 손님에게 대접할 잔치국수를 만든다거나 아니면 막걸리가 있는 날이면 부엌에서 술안주를 장만하셨다.

 

내가 초등학교에 다니기 시작하자 아버지께서는 나를 불러 “아버지가 부르는 대로 쓰거라.”라고 하시며 나에게 답장을 쓰게 하셨다. 그런데 아버지께서 불러주시는 편지 내용은 항상 ‘아무개야 잘 있었느냐? 어머니도 아버지도 네 염려 덕분에 잘 지내고 있단다.’라고 쓴 후 줄 한 칸을 건너뛴 후, ‘어느덧 세월은 유수와 같이 흘러,”라고 하셨다.
그 내용은 누가 왔건 어떤 내용이었건 같은 문장으로 시작되었던 것이 생각나는 지금.  유수와 같은 세월, 태어나고 걸어왔고, 누군가 떠나버렸고, 맞이하였고, 슬픈 날, 기쁜 날, 행복한 날, 슬프고 고통스럽던 날 다 보내고 우리는 지금 주름진 얼굴로 이곳에 서 있다. 작은 씨앗 하나가 싹을 틔우고 열매를 맺고 꽃을 피우는 신비를 부르는 세월을 뒤로하며 우리는 다시 추억을 만들어 가고 있다.
“어떻게 살아왔는지 기억하고 싶지 않아요. 어찌 보면, 한 많은 세상 삶이 아니었든가 합니다.”라며 한숨 쉬는 노인의 얼굴에 지나온 세월은 정말 유수와 같이 흘러 그 흘러간 세월을 기억조차 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아름다웠던 지난 추억이 지금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라는 노인은 그래도 남부럽지 않은 젊은 시절을 보냈고, 그 세월은 항상 자신의 것으로만 알고 살았는데 세월이 흐르고 보니 언제부터인지 자신의 삶이 조각난 유리 같은 삶을 살고 있다고 했다. 아내도 떠나버렸고 늙고 병든 아버지를 수발할 수 없는 자식도 아버지의 아픔은 아버지의 것으로 안긴 채, 자주 찾지도 않는다는 말을 들으며 그 아들도 언젠가는 아버지가 겪는 아픈 외로움과 고독을 겪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제 그는 의지할 곳이 없었다. 그저 홀로 병든 몸을 벽에 의지한 채 추운 겨울을 맞을 수밖에 없었다. 아픈 몸으로 밥을 끓여 먹어야 하고 홀로 병원을 찾아야 하는 그에게 “지금 어디서 사세요?”라고 물으니 “노인 아파트를 신청했는데 아직 안 나왔어요. 하는 수 없이 남의 집 방 한 칸 얻어 사는데 이렇게 아프다 그 집에서 죽으면 어쩌나 하는 게 주인 걱정인 것 같아요.”라며 다시 한번 큰 한숨을 내쉰다.
아! 그랬다. 그 행복은 우리 곁에 영원히 머무르는 것이 아니었다. 가족이 없어도, 배부르게 먹지 않아도 건강을 잃으면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했다. “제가 그렇게 크게 잘못하고 산 것도 아닌 것 같은데 저에게 이런 고통을 주신 하느님이 원망스럽습니다.”라는 노인, 병은 하느님께서 주신 것도 아니련만, 그는 답답한 속마음을 하느님께 돌리고 있었다.
굽이진 길을 걷고, 뒤돌아보고, 뛰며 살아온 세월이 아니었든가. 우리는 무엇을 하며 살았으며 무엇을 위해 살아왔던가,
“그냥 콱하고 죽어버리면 좋으련만, 그것도 제 마음대로 안 되는 것 같습니다.”라는 노인은 그래도 목숨이 붙어 있으니 사는 그날까지 살아야 하겠지요?”라며 껄껄 웃는다. 그러나 노인이 흘린 미소는 행복의 웃음이 아니라, 슬픔으로 가득한 웃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며칠 후, 노인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그날 제가 너무 헛소리만 들려드려서 죄송합니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습니다. 이해해 주세요.”라고 하였다.
그의 병은 그의 것만이 아니었다. 나의 것도 될 수 있고, 너의 것도 될 수 있을 것이다. 함께 나누며 함께 위로할 수 있는 그 시간만 있어도 우리는 행복할 수 있을 것이다.
잡고 싶어도 잡을 수 없는 세월, 어딘가에 잠시 묻었다가 꺼내 먹을 수 있는 홍시라면 얼마나 좋을까마는, 세월은 그저 나 몰라라 하고 지나가 버리는 잡을 수 없는 것이 세월이라는 것이 허무하다. 그러나 어쩌랴! 세월은 바로 흘러가 버리는 인생인 것을, 그래서 세월은 유수와 같이 흐른다고 한 것이었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