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 바람이 옷깃을 스친다. ‘우리 고유 명절 ‘설’이 되었지만, 설 같지 않은 설, 명절 같지 않은 명절이 눈 뜨고 나니 그냥 지나가 버렸다. 누군가가 “떡국 먹었어요?”라고 묻는다. 우리는 떡국도 잊고 사는 것은 아닐까? 누구나 그렇겠지만, 항상 이맘때쯤이면 사람들은 고향을 생각할 것이다. 어렸을 때 아침을 먹고 난 뒤 부모님께 세배한 것은 부모님의 만수무강을 위해 한 절이 아니라 세뱃돈에 눈독을 들였던 것이었다. 조그만 복주머니를 손에 들고 집집이 찾아다니며 세뱃돈을 받던 그 재미에 푹 빠졌던 어린 그 시절, 설만 되면 아련하게 떠오르는 어린 시절의 그 추억이, 그저 멀리 두고 온 고향에 대한 향수가 마음속에 깊게 자리한다. 아름다움을 나누고 정을 쌓았던 명절이 그립다. 어느 자매가 “이번 설엔 어려운 이웃들을 위해 마련한 행사는 없나요?”라고 묻는다. 처음엔 그게 무슨 말인가 했는데 그것은 곧 어려운 이들을 위한 특별 명절 이벤트가 없는가? 라는 질문임을 알았다. 타국살이의 삶 때문에 그냥 쉽게 지나치는 설, 그러고 싶은데, 그러고 싶은 마음은 많지만, 옛날 같지 않게 그런 행사를 준비한다는 것이 여유롭지 않다.
명절이 되면 어렵게 사는 이웃과 함께 한 끼의 식사를 나누고 작은 선물 한 꾸러미 나누며 별것도 아닌 작은 모임에 기쁨을 나누었지만, 지금은 그럴 여유가 없는 것이 어쩐지 미안하고 죄송할 뿐이다. 정말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너무나 감사한 마음으로 쌀 포를 받아 들고 떠나던 우리 이웃들, 그들을 보면서 아픈 가슴을 억눌렀던 시간, 눈물을 보이며 몇 번이나 감사함을 되뇌던 아저씨, 앞으로 몇 달간 먹을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며 기뻐하던 노인들, 그렇게 우리의 작은 마음이 우리 이웃들에게 기쁨을 안겨 줄 수만 있다면 더 많이 노력하고 더 많이 사랑하고 더 많이 마음을 나누는 일을 해야 하지만, 올해엔 마음은 있지만, 모든 일이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후드 스탬프가 $15가 나와요. 그것 가지고 어떻게 살겠어요.”라고 말하는 할머니는 “이거 가지고 고기 한 점 사 먹을 수도 없어요.”라며 입을 실룩인다. 늙은 나이에 삶의 고달픔을 겪어야 하는 것은 슬픈 일이다. 이런저런 걱정 때문에 마음이 기쁘지 않은 노인들, 한평생 그토록 열심히 일하며 살아왔던 것은 늙어서 편하게 살기 위해 살았던 삶은 아니었을까? 그런데 어쩌다가 돈 한 푼에 슬픔과 고통을 겪으며 살아야 할까? “평생 일하면서 살았지만, 지금은 이렇게 궁색하게 사네요.”라고 말하는 할머니의 얼굴엔 살아가는 세상살이가 너무 재미없어 보인다. “아들 집에 가면 멍멍이처럼 집이나 지키고 있고 나오니 갈 데도 없고 가봐야 별로 재미도 없고 휴~뭐 때문에 사는지 모르겠어요.”라고 한다. 정말 그럴까? 하긴 운전이라도 할 수 있으면 휭~하니 어디 바람이라도 쐬고 올 수도 있으련만, 이것도 저것도 아닌 하루살이 삶이 노인에겐 지겨운 하루살이 인생이었다.
노인은 자리를 훌훌 털고 일어나더니 “지금도 쌀 같은 것 나누어 줘요?”라고 묻는다. “왜 쌀이 필요하세요?”라고 하자 “한 포대 있으면 좋지요. 그런데 없으면 안 줘도 돼요.”라고 한다. “쌀은 있는데 라면은 다 떨어졌어요.”라고 하자 “라면은 없어도 돼요.”리고 하기에 기꺼이 쌀 한 포대를 실어다 아파트에 갖다 주었다. 노인의 얼굴엔 잠시 기쁨의 미소가 흘렀지만, 그것은 정말 잠시 흐르는 미소일 뿐이었다. 노인에게 명절은 쓸모없는 설이었다. 이 추운 날씨에 함께 손을 녹이며 이야기 나누며 떡국 한 그릇 나누어 먹을 수 있는 친구가 더 절실한 것은 아닐까? 노인은 “쓸데없이 주접떨어서 미안해요. 그래도 내 말 들어줘서 정말 고마워요.”라고 하였다. 잠시나마 자신의 말을 들어주고 친구가 되어 준 그 시간이 노인에겐 즐거움이었나 보다. 내 말을 들어주는 사람만 있어도 기쁨이고 말할 수 있는 친구가 있어 행복이었다.
어떤 할아버지는 밥을 먹은 후, 남은 음식을 고무 봉투에 쓸어 담고 있었다. “뭐 하세요?”라고 물으니 “이거 버리실 거면 제가 가져다가 저녁에 먹으려고요.”한다. 노인은 “혼자 사는데 저녁을 변변하게 먹을 수가 없어서”라고 한다. 고무 봉투에 뒤엉켜 담겨 있는 그야말로 개밥도 아니고 정말 보기에 흉했다. 남의 집에서 방 한 칸 얻어 사는 노인은 밥을 해 먹을 수가 없다고 하였다. 한 상자 남아있는 3분 라면을 보더니 “저거 제가 가져가면 안 될까요?”라고 하기에 “조리할 수 없다면서요?”라고 하자 “뜨거운 목욕탕 물을 받아서 부으면 금방 먹을 수 있어요.”라고 하였다. 하~아, 이런 지경을 보았나, 너무 황당하여 노인의 얼굴만 들여다볼 수밖에, 말을 할 수 없었다. 노인은 라면 한 상자를 겨드랑이에 끼고 어딘가로 향하고 있었다. 그런 노인을 보며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고개만 좌우로 흔들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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