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이포 리발소

고백하자면 나는 사실 계집아이였던 시절에 아버지를 따라 이발소를 다녔다. 늘 이발소 아저씨가 깍아주는 머리는 직사각형의 밑변이 빠져있는 완벽한 ‘ㄷ’자 단발이었는데, 시절로 보아 딱히 따아 기른 머리를 제외한다면 어린 계집아이의 머리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는 그시대의 유행한 머리 스타일 이였던것 같다. 하지만 아버지를 따라나서는 이발소행은 극성스런 남동생들을 따돌리고 아버지를 독차지해서도 그랬겠지만 늘 기분 좋은 추억으로 아직도 내게 남아 있다.

 

 

우리 가족끼리는 그 시절을 훗날 살던 주소를 근거로 “산 9번지 집”에 살때로 언급되어지는데 거기에는 오늘날과 같은 텔레비젼은 물론 도서관도 없고, 라디오도 귀하던 시절이라 근처 도자기 공장에서 정오 12시가 되면 흔히 오포를 분다고 표현하던 싸이렌 소리로 시간을 알려주던 시절이었다. 그러니까 초등학교 저학년이 접할 수 있는 문화가 전무한 시절의 해방촌살이였지만 아버지와 내가 가던 <겸이포 리발소>는 분명 한 문화의 형태로 자리잡은 내게는 하나의 거대한 사원이었다.

 

 

그곳에는 우선 순서를 기다리는 도마의자 옆에 <새소년>등 보기드문 잡지들과 어른들이 보는 신문도 두종류나 있었고 커다란 거울 양쪽 벽에 교실의 교훈이 있어야할 자리에는 밀레의 <만종>이라는 그림이, 그리고 급훈 자리에는 한 농부가 헤설피 우는 소를 따라가며 힘겹게 밭을 가는 배경으로 멋부려 흘려쓴 한글체로 세로로 씌여져 있었다. 친절하게도 제목 그래 놓고는 <푸쉬킨의 삶>이라고 적혀 있었다. 의아했던 것은 밀레의 <만종> 그림에는 제목과는 달리 어느구석에도 종이 없었고 푸쉬킨의 삶이란 시에는 ‘삶’은 없고 일하는 모습만 있어 아버지에게 물었던 기억이 있다.

 

 

그렇다고해서 벌거숭이 맹탕은 아니었든지 거듭되는 이발소 출입으로 나중에는 제법, 해지는 저녁 신성한 노동의 하루일을 마친 후 아득하게 들려오는 교회 종소리와 부부의 기도등을 제법 조리있게 이해했을 뿐만아니라, 삶의 진상을 속속들이 알 수 없는 어린아이였지만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마라”로 시작되는 그 시를 마음속에서 따라 읽다보면 공연히 콧등이 시려오고 숙연해지면서 믿기지 않겠지만 성년의 힘겨운 삶을 나름대로 진득히 이해했던 건 아니었는가 싶다. 그래서 나는 끝까지 자라 어른이 될까 두려워 교복입고 머리딴 양숙이 언니만큼만 자랐으면 했다.

 

 

어린 내 감성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제법 나중에는 틀리지 않고 그 시를 암송할 수 있게된 것을 자랑스레 여겨 3학년 학예회때는 그걸 굳이 암송한다고해서 당황한 선생님의 혀를 차는 만류속에 애석하게도 그 시낭송을 포기해야만 했다. 허구한 작명중에서도 이발소 간판으로 고향의 지명을 내세운 것만 봐도 사무치는 그리움 같은 것이 어린 내게도 전해져 왔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아버지는 같은 황해도 피난민으로 두고 온 고향산천 겸이포를 추억하는 그 애절한 모습이란…. 언젠가 사과농사가 지겨워 가출하여 보게된 평양의 번화함과 수학여행으로 다녀온 당시의 경복궁을 추억하다 에구! 그 땅을 언제 밟아보나 하면 늙은이 처럼 한숨을 포옥! 내쉬곤 하셨다.

 

 

어느덧 내 순서가 끝나고 이발소 팔걸이 위에 보조로 걸려져 있는 송판에서 내려와 이제는 그 거대한 바퀴 손잡이가 달린 의자에서 왕처럼 앉아있는 아버지의 차례가 된다. 타일이 굵직하게 박혀있는 세면대에서 시녀가 감겨주는 느긋한 착각속에 머리를 감고 있는 모습을 보며 왜 우리 집엔 이 세련되고 깔끔한 문화적 세면대가 없는지 그저 속상하기만 했다.
머리감기가 끝나고 다시 어느새 손바퀴를 조정하였는지 거의 눕다시피하여 아버지는 면도를 받고 있다 머리카락이 떨어지는 것 막기위해 커다란 보자기를 쓰고 있는 아버지의 모습은 복장의 유사성때문인지 거만한 자세로 인한건지 어느새 그대로 왕으로 등극한 로마의 황제가되어 있었다. 주철 난로 연통에 비누거품을 묻힌 솔을 몇번 비벼 적당히 뎁힌후 까칠한 아버지 얼굴과 목에 넉넉하게 칠하고는 능숙한 솜씨로 닳고닳은 가죽혁대에 칼면도를 이쪽저쪽 번갈아 벼룬다.

 

 

이윽코 번득이는 날을 아버지 목에 대고는 한치 주저도 없이 목을 타고 주욱 주욱 훝으며 내려가면 ‘싸아악’ 소리와 함께 비누거품이 면도날에 걸리면서 말끔하게 소름돋은 아버지 목이 드러나고 순간 정육점 아저씨의 고기를 발라내는 익숙한 손놀림이 내 머릿속에서 겹쳐지면서 나는 그만 눈을 감고 만다. 만약 이발소 아저씨가 딴마음을 먹는다면… 그리되면 아버지 없이 성냥팔이 소녀와 소공녀처럼 살아갈 내모습과 가족을 그려지면서 나는 거의 울상이 된다. 비정하지만 아버지의 죽음을 상상하면서 나는 영악하게도 내가 살아갈 고민을 했다. 그것이 염치없어 아버지 안 아퍼? 거푸 묻는다. 사람들이 왁자하게 웃으면 나는 그제야 안심이 되어 희미한 웃음을 짓는다. 붉고 푸른색 띠가 나란한 대각선으로 끝없이 말아 올라가는 이발소를 뒤로하고 부녀는 손을 잡고 해지는 산 9번지를 올라간다. 지나고보니 허망하게도 반세기전 계집아이의 기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