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님!

정월 대보름이 되면 제일 먼저 생각나는 것이 쌀, 보리, 조, 콩, 기장을 넣고 짓거나 찹쌀, 찰수수, 차좁쌀, 붉은팥, 검정콩을 넣고 지은 오곡밥과 취나물, 시금치, 무나물, 건 가지나물, 호박고지 나물로 상을 차려 먹었던 그 시절이 있었건만, 그런 밥을 먹어 본 지 너무 오래되어 그저 옛 추억으로 기억할 뿐이다. 또 저녁이 되면 언덕에 가서 둥근 보름달을 쳐다보며 아버지가 만들어 주신 깡통에 숯불을 담아 돌리며 소원을 빌었었다. 그때 나는 숯불을 돌리며 달님께 무슨 소원을 빌었을까? 수십 년이 지난 지금의 내가 있게 해 달라고 빌지는 않았을 것 같다. 아마 모르긴 해도 ‘공부 잘하게 해 주세요.’라고 했을 것 같다. 요즘도 그런 풍습이 이어져 가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왠지 모르게 이번 정월 대보름엔 언덕에 올라 달님을 보며 “달님, 가난하고 헐벗고 굶주리는 사람들, 그리고 갈 곳 없어 거리를 방황하는 사람에게 은총을 베풀어 주소서.”라며 소원을 빌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진다. 그리고 말기 암으로 고통 속에 있는 아내에 대한 애절한 마음으로 한숨 쉬던 남편을 대신해 “달님, 그녀의 병도 낫게 해 주세요.”라고 빌고 싶은데 정말 그러면 소원이 이루어질까? 아마 마음이 아름다우면 달님이 주님께 나의 소원을 전달해 주실지도 모를 일이다.

 

 

그의 이야기는 이어졌다. 간암이 폐로 전이된 아내는 모든 치료를 중단한 채 누워있었다. 그 아내를 바라보는 남편의 마음, 그런 엄마를 바라보아야 하는 아들의 마음이야 오죽하리오만, 그래도 그는 “아내는 저렇게 누워있는데 간호도 그렇지만, 그래도 한 달에 얼마라도 벌어야 먹고 살 수 있지 않겠어요?”라며 나의 얼굴을 바라본다. 내일모레 죽음을 맞이할지라도 우리는 그래도 먹어야 하는 인간이기에 어쩔 수 없이 생계를 걱정하는 남편, 노인 아파트를 신청하며 “아내 이름은 아예 넣지 않는 게 어떨까요?”라고 묻는 그의 얼굴엔 아내에 대한 모든 희망을 접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도 아직 살아계시잖아요. 그러니 그냥 넣는 게 옳을 것 같습니다.”라고 하자 “그럴까요? 아내는 그때까지 살지 못해요. 이미 각오는 되어 있지만, 어쩌겠어요. 이젠 자신도 모든 것을 포기한 상태에요.”라고 하였다.

 

 

그래도 떠나는 그 날까지 그녀는 그의 아내이고 아들의 어머니였다. 아직 살 날은 먼 데, 그녀는 그렇게 모든 것을 포기하고 남편과 아들 곁을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고 “이제 아들이 곧 결혼하는데 아들 결혼하는 모습은 보고 가야 할 텐데.”라고 중얼거리는 그도 아내와의 이별을 준비하고 있었다. 일주일에 단 며칠이라도 일 할 수 있는 곳을 찾는다는 그의 얼굴이 착잡해 보인다. 이제 은퇴하여 편하게 여생을 즐길 그 나이에 그는 아내를 보내야 하는 고통 속에서도 살아가야 할 길을 마련해야 하는 인생, 어찌보면 그게 다 우리가 살아가는 방법일진대 애통해하는 그의 얼굴은 많은 걱정이 가득 배어있었다.

 

 

우리는 정월 대보름을 맞이하여 옛 음식을 생각하며 행복한 추억 속에 아쉬움을 달래건만, 그는 오곡밥도 나물도 마음에 없는 듯하다. “모르겠어요. 이렇게 사는 거지요. 어쩌겠어요.”라고 말하는 그의 마음엔 다시 돌아올 수 없는 먼 곳으로 떠날 준비하는 아내에게 향하는 애틋한 마음이지만, 그래도 아내가 가고 없어도 홀로 살아가야 하는 인생의 서글픔이 마음을 아리게 한다. 떠나는 당신이야 눈 감고 두 주먹 놓아버리면 그만이겠지만, 보내야 하는 그 마음은 아픔과 고통뿐이다. 더 잘해주지 못해서, 더 많이 사랑해 주지 못해서 그리고 당신을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한 남편.
누구나 가야 하는 길이겠지만, 아예 언제 떠날지 모르고 있다가 떠나가면 이토록 가슴 미어지는 아픔은 없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서서히 죽음을 준비하는 아내의 모습, 엄마의 모습을 바라보아야 하는 그들의 아픔은 그저 잠깐 스쳐 지나가는 아픔이 아닌 고통과 슬픔이 함께하는 암흑일지도 모른다.

 

 

이번 정월 대보름엔 비가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휘영청 밝은 밤에 커다란 보름달을 바라보며 깡통에 숯불은 담아 소원을 빌 수는 없겠지만, 애처로운 그의 심정을 나의 마음에 담아 달님께 소원을 마음을 담아 “달님, 달님, 저 여인에게 건강을 더 허락하시어 조금만, 그들의 가정에 평화가 깃들게 해 주소서.”라고 마음을 전하고 싶다.

 

 

예진회 봉사센터 웹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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