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사연이지 모르지만, 만삭의 몸으로 교도소를 들어간 여인이 아기를 낳아 키웠지만, 이제 아기는 엄마와 떨어져야 한다는 생각에 엄마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아이는 18개월 후면, 밖으로 나오는데 돌봐 줄 사람이 없습니다.”라는 사연을 읽으며, 잠시 눈을 감는다. 이 여인이 걱정하는 것은 나중에 수감생활을 마치고 사회에 나왔을 때 아기를 자신이 키워야 하는데, 아기가 당장 갈 곳이 없으니, 보육원에 맡겨져 입양을 가게 되면 아기를 영영 못 만난다는 생각에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어쩌나! 나는 아기 엄마가 안타까운 것이 아니라, 자신을 낳아 준 엄마와 영원한 이별을 하게 될지도 모를 아기가 더 안타까웠다. 18개월이면, 한 살 반. 이제 그 아기는 어디로 가야 할까? 아무것도 모르고 방실거리며 웃고 있을 그 아이가 마음 한구석을 아프게 비집고 들어온다. 그때, 강원도 어딘가에 수녀님들이 부모 없는 아이들을 맡아 기르는 곳이 생각났다. “혹시 보육원보다 그곳으로 보내는 게 어떨까요?”라고 묻자, “그곳에선 입양 보내지 않나요?”라고 묻는다. 글쎄 그것까진 잘 알지 못하지만, “아마, 수녀님께 말씀드리시면, 보내지 않을 겁니다.”라고 하자 잠시 깊은 한숨을 쉰다. 교도소, 세상에 갈 곳이 너무 많고 또 가 보고 싶은 곳이 너무 많다지만, 그래도 가지 않아야 할 곳이 바로 그곳이리라. 더구나 임신한 엄마가 교도소에서 아기를 낳아 키웠는데 한창 재롱떠는 예쁜 아기와 헤어져야 하는 엄마에게 아기의 아빠에 대해 질문하지 않는 게 예의 같았다. 자식과 떨어져야 한다는 것은 부모에게 있어 아픔이었다. 그러나 떠나야만 하는 어린 자식을 잡을 수 없는 부모의 마음은 살갗이 갈래갈래 찢어지는 고통일 것이다. 내가 옆에 있다면 키워주고 싶었다. 그 여인이 얼마 동안 그곳에 머물러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아기의 보호자가 되어 주고 싶었다. 그러나 그것도 마음대로 안 되는 일, 그녀는 다시 생각해 보고 연락해 주겠다고 했지만, 오늘도 그 아기를 가슴에 안고 눈물 흘리고 있을 엄마가 애처로워 마음이 아프다. “그래, 아가야, 우리가 지금은 헤어지지만, 엄마가 널 찾아갈 때까지 잘 자라고 있어라.”라며 아가의 등을 토닥이고 있을 엄마,
왜? 그녀는 창살 안에 갇혀 있는 것일까? 어쩌다 그곳에서 아기를 낳아야만 했던 것일까?
그 사연이야 알 수는 없겠지만, 또 하나의 아기가 고아가 되어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되었다. 부모가 있은들, 함께 살아갈 수 없는 엄마와 자식, 그 어린 것이 아무것도 모른 채 낯선 사람 사이에서 엄마를 찾으며 울고 있을 그 아이가 너무 가엾기 그지없다.
이 세상에 부모 없는 아이가 어디 있을까? 뭐 엄마가 성모 마리아라면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성모 마리아는 예수님을 버리시지 않으셨으니, 그때는 보육원이라는 것도 없었을 것이다. 추운 겨울이라지만, 쩔쩔 끓는 뜨거운 방에 아이들이 웃으며 장난치며 뛰놀던 생각이 난다. “아이들 감기 들면 안 되니까 이렇게 방을 뜨겁게 한답니다.”라고 말씀하시던 수녀님, 엄마 없는 아이들의 엄마가 되어 자식에게 정성을 쏟던 수녀님, 그래도 아이들을 고아라고 생각하지 않고 하느님께서 보내 주신 귀한 천사라고 하셨다. 그랬다. 그분들은 주님께서 보내주신 성모님이셨다. 그래서 예수를 낳고 천사를 키우시는 그런 분들이셨다. 그 아가도 성모님께 보낸다면, 자신을 낳아 준 엄마를 다시 만날 수 있을 텐데. 어떤 결정을 할지,
“성폭행을 당해 어쩔 수 없이 태어난 자식이 아버지에게 감사할 일인가요?”라는 딸의 말에 “감사는 뭔 얼어 죽을 감사예요? 그래도 당신을 버리지 않고 낳아 준 엄마한테만 감사하세요.”라고 하자,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라는 대답을 들으며. 참 이 요지경 속의 세상을 어떻게 다스려야 하나? 라는 생각에 주님께서도 머리를 싸매고 누워계실 것이다. “이놈들아 둘이서 한 몸이 되어 아들딸 낳고 알콩달콩 잘 살아라.”하고 하셨는데, 아버지는 어디로 가고, 엄마만 뎅그러니 혼자 앉아 있는가. 그리고 그 엄마마저 떠나가 버린 어 아이들의 눈가에 맺힌 이슬방울을 흘리며 엄마를 기다리는 아이들, 왜 이리 가슴이 답답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