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반 길은 숲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열대 온대 한대 등 여러 기후대가 모여 오랜 세월 키워낸 원시림으로 숲은 활기찬 생명력으로 풍요로운 숨을 내쉬고 있습니다. 만년설과 빙하가 있는 산이지만 습하기도 하여 초목을 풍성하게 키워내는가 봅니다.
물기 먹은 낙엽을 밟으며 갓길에서 안전 가드 역할을 해주는 바위들을 스치며 이리저리 에둘러 가는데 하늘을 찌를 듯 솟아오른 나무들이 시야를 가립니다. 이렇게 우거진 숲길을 지날 때는 산들이 보이지 않으니 차라리 길섶의 소소한 것들에 마음을 줄일 입니다.
계절에 걸맞지 않게 환경에 어울리지 않게 야생화들이 제법 소담스레 피어 있는데 어쩌면 이 들꽃들은 계절과 기후를 망각하고 사는지도 모릅니다. 나무를 따라 꽃을 따라 향기를 따라 쫒아가다 보니 어느새 나무들의 키가 땅으로 내려앉고 넓은 목초지가 나옵니다.
이제는 숨겨 놓은 빙하의 자락들이 보이고 뒤돌아보면 레저렉션 강이 해협으로 흘러가는 계곡의 풍경이 펼쳐집니다. 멀리 시워드의 해안 마을이 아스라이 보이고 황금색 가을 들판으로 삶의 무게를 싣고 달려가는 차량들도 조그마하게 보입니다. 인간의 삶과 자연이 원래부터 일부였던 것처럼 그렇게 어우러져 있습니다.
검은 구름이 머리위에 와 머물고 어서 가라고 다구칩니다. 제발 산행동안만은 비가 오지 않아 주기를 타협처럼 기원합니다.
넓은 목초지가 나오고 붉은 단풍들이 바닥을 기어가는 위로 안개가 자욱합니다. 또 그 위에는 계곡을 타고 폭포가 흘러내립니다. 만년설이 뿌리는 폭포는 신이 내리는 축복. 그 물줄기가 영혼을 씻어주고 새 생명을 품는 듯 마음이 가볍고 새로워지니 이어지는 절벽길도 고개로 다가가는 가파른 길도 힘차게 오를 수 있습니다. 그래도 정상이 가까워질수록 체력은 떨어지고 한걸음 한걸음 떼기가 참 힘에 버겁습니다.
더욱이 서로를 북돋을 아름다운 동행도 없어 그저 이럴 때 오직 한 동무 내 안의 나를 토닥이며 산을 바라며 길을 오릅니다.
산은 좋은 친구이자 삶의 일부입니다. 기다린 듯 반겨주는 저 비경. 온산을 내리누르고 있는 구름과 비. 영겁의 시간동안 산마루를 지켜온 빙하. 자신을 녹여 빙하호를 만들어 우리 인간들에게 절경을 선사합니다.
산정을 적당하게 덮고 있을 것 같았던 빙원이 끝도 없이 이어지고 그 광대한 풍경에 속절없이 무장해체를 당한 채 발이 얼어 붙어버립니다. 공기마저 엄숙하게 가라앉은 이 순례자의 길 끝에서 나는 저절로 숙연해질 수밖에 없고 말없이 술 한잔 담배 한개피로 등정의 의미를 삼키고 내 뿜습니다.
더 이상의 접근이 허락되지 않은 성산. 순백으로 쌓인 시간만큼 고결한 산마루에 서니 오름의 고난도 한 줌 바람이 되고 비좁은 마음을 채웠던 욕심도 회한도 한 점 먼지가 되어 흩어져 버립니다. 저 구름안개 속으로 사라져 버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