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들 어떠하고 저런들 어떠하리

해맑은 눈으로 웃고 있었지만, 그 마음은 슬퍼 보였다. 그것은 웃으면서도 내쉬는 한숨 소리가 애절하게 들리기 때문이었다. 일하고 싶지만, 건강하지 않았고, 재주는 있되 돈이라는 녀석이 없어 제대로 된 공간 하나 마련할 수 없었다. 무엇을 해 주어야 할까? 어떤 것을 해 주어야 하나? 라고 생각해 보지만 나도 딱히 뭘 권장해 줄 수 있는 것이 조그마한 내 머릿속엔 없었다. 보내자니 마음이 짜릿하고, 두자니 별수 없고, 이럴 때 가장 힘든 것은 역시 마음속을 깊게 뚫고 파고드는 애잔함을 달랠 수 없다. 그가 빗속을 뚫고 저 멀리 사라지는 모습을 바라보며, 나오느니 한숨뿐이다. “저도 좀 도와주세요.”라는 말을 들으며 “뭘 도와드려야 할까요?”라는 대답이 그냥 허공을 맴돌고 있을 뿐이다. “사는 게 너무 힘들어요. 일하자니 아이가 아직 어리고, 남편만 바라보자니 매일 힘들게 일하는 남편이 안쓰럽고, 뭘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라는 그녀를 보며, “글쎄 나도 뭘 하라고 말하기 힘드네요.”라는 허무맹랑한 소리만 지껄이고 있으니. 하! 공연스레 내 어깨가 무겁기만 하다.

요즘은 뉴스도 보기 싫고, 누가 어쩌니저쩌니하는 소리도 듣기 싫다. 세상이 어쩌려고 이렇게 시끄러운지, 차라리 눈을 감고 귀를 막는 게 훨씬 편하다. 대통령을 탄핵한다고 세상 떠나가게 지랄들 떨더니 이젠 탄핵을 반대한다고 세상 떠나가게 염병을 떨고 있다. 그래도 촛불시위 때문에 초 장사 초 많이 팔아 부자 되고, 태극기 펼쳐 들고 시위하는 바람에 태극기 장사꾼이 그래도 이득은 보았으려나? 외국인 의사가 “한국은 도대체 왜 저러는 것이냐?”라고 물었다. 대답하기도 그렇고 안 하기도 그래서 “이메일로 직접 물어보라.”라고 하자, “누구에게 이메일을 보내느냐?”라는 대답에 한 바탕 웃고 말았다. 세계에 한국을 빛낸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그 자랑스러웠던 한국이 이제 자랑이 아닌 수치가 되어버렸다. “박근혜가 일본에 아들이 있대요.”라고 하자 어떤 사람은, “은지원도 박근혜 아들이래요.”라고 한 마디 거든다. 그럼, 정유라도, 은지원도, 일본에 있는 아들도 다 그녀의 아이들이라면, 세 번이나 아이를 낳은 그 사실을 왜 우리는 지금까지 몰랐을까? 임신한 것 본 일 없고, 애 낳았다는 말 들은 적도 없는데, 근거도 없이 별 염병들을 다 떨고 있으니, 오라는 눈은 안 오고 비만 자꾸 내리는 게 아닐까?. 그런들 어떠하며 안 그런 들 어떠하리. 그런 헛소문에 마음을 쓸 것이 아니라. 찾아와 하소연하는 우리 이웃을 어떻게 도와주어야 할까만 생각하자. 그래, 우리가 할 일만 하는 것이 맞긴 맞는데, 한 번씩 와서 그런 말 하는 사람을 보면 왠지 짜증만 난다. 트럼프가 대통령이 되었으니 큰일 났다는 사람, 앞으로 미국이 더 잘 살 게 될 것이라는 사람, 박근혜가 나라 망쳤다는 사람, 박근혜가 억울하다는 사람, 아이고 나도 모르겠다. 큰일이 나도 내 앞길 잘 가면 될 것이고, 잘살게 된다 해도 어려움 겪고 있는 사람에게 땡전 한 푼 나올 구멍도 없을 바엔, 정말 이런들 어떠하고 저런들 어떠하리오.

한 통의 전화를 받는다. “우리 아들이 장가를 안 갔는데 어디 좋은 여자 있으면 소개해 달라.”라고 한다. 아니 장가 못 간 (안 간 것인지 모르겠지만,) 아들의 짝을 부모도 못 찾는데 내가 어디 가서 여자를 찾나? “죄송하지만 저희는 그런 일은 하지 않습니다.”라고 내뱉는 말이 어찌 다정스럽지 못하다. “아니, 혹시나 해서, 있으면 잊지 말고 연락 좀 해 줘요. 나이는 자꾸 먹는데 영 장가갈 생각을 안 해요.”라는 노인의 말을 귓등으로 들으며 “나 보고 이젠 중매쟁이를 하라는 건가?”라고 중얼거린다. 하긴 오죽 답답하면 그런 말까지 하겠느냐만, 찾아와 어려움을 이야기하는 우리 이웃을 생각하기도 마음이 빠듯한 우리, 많은 이들을 만나면서 가장 아프게 느끼는 것은 장애를 가졌거나 몸이 아픈 이들의 생활고를 들을 때이다. 한쪽 발을 끌며 그래도 살아가야 하므로 직장을 찾는 그가 애처로워 마음을 쓰고 있는데 뭔 중매?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은 잘난 쌀 한 봉지가 아니었다. 살아갈 수 있도록 적은 돈이라도 벌 수 있는 직장이었지만, 그들에게 내어 줄 수 있는 일거리는 없는 모양이다.

돈이 많으면, 공장이라도 하나 지어 일거리 하나씩 골고루 나누어 주고 싶은데. 그런 재주가 없으니, 그저 찾느니 죽으나 사나 ‘하느님’이다. 그러나 찾아도 불러도 들어주시지 않으니 이것도 하느님의 뜻은 아닌가 보다. 그래도 해야겠지? 죽으나 사나 하느님을 찾는 일을?

오직 믿을 분은 그분이시니까. 힘없는 그들에게 주실 은총을 바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