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의 문외한이라도 우리 모두 한번쯤 반 고흐의 이름은 들어봤을 것이다. 네덜란드 화가로서 일반적으로 서양 미술사상 가장 유명한 화가로 인정받고 있는 고흐는 120년전 사람으로 대중에게도 친숙한 <몽마르트 언덕의 초상화>, <해바라기>, <별이 빛나는 밤>, <아이리스>, <밤의 카페 테라스>등 무수한 작품을 남겼다.
반 고흐는 체계적인 미술 공부를 하지 못했다. 그저 당시 있던 그림을 모사하며 스스로 독학을 했는데, 27세가 되어서 화가 활동을 시작한 그는 37세에 짧은 인생을 마치기 전 유화로만 900점 소묘와 목탄화등 다른 작품을 합치면 거의 2000점의 작품을 남겼다. 한 주에 약 4개를 그린 셈이다. 주로 모델료가 없어서 자화상을 많이 그렸으며, 생전에 그림이 팔린 것은 놀랍게도 죽기 일년전에 400프랑에 팔린 <붉은 포도밭>이 전부였다. 그것마저도 동생 테오에게 감사의 뜻으로 준 것인데 수완좋은 동생이 팔아서 그 기록을 깼다 나머지는 그가 죽고나서 유명해진 것으로 하여간 돈에 관해서는 지지리도 복도 없는 사람이었다.
화가가 되기 전 헤이그에 있는 화랑에서 그림을 팔던 고흐는 손님들과 작품을 보는 관점의 차이로 자주 싸워 해고당한 후 감리교 신학대학을 다니다 그마저도 그만 두었다. 그래도 신학에 대한 신념은 있었던지 벨기에의 가난한 광산촌에서 평신도 설교자가 되어 보수없이 살았다. 이 기간 동안 물감이 없어 목탄화를 그리기 시작했으며 그의 그림에 자주 등장하는 감자와 가난한 사람들의 모습이 바로 이 곳에서 받은 영향이었다.
형의 재능을 알아본 동생 테오의 경제적 지원을 받아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린 시기가 그의 나이 27살 때였다. 거의 독학으로 깨닫게 된 것으로는 그가 빛을 다루는 방식과 흔히 점묘화법이라 부르는 끊어 찍는 산만한 붓 자국등 그마저도 물감을 희석하지 않은 채 걸죽하게 칠했으며, 심지어는 지금은 흔한 방법이나 물감을 튜브에서 직접 짜서 화폭에 바름으로 입체감을 높혔다.
파리 시절에는 색을 짧은 선 모양으로 나란히 칠하고 자신의 그림을 좀 더 생생하게 형상화하기 위해서 선을 율동적으로 구성하고 그것도 모자라 물결 모양, 원 모양, 나선형으로 배열하기도 했다. 죽기 일년전에 제작된 자화상과 〈별이 빛나는 밤〉이 그 예로서 훗날 뒷사람들에게 후기 낭만파로 불려지는 계기가 되었다.
신학대학도 집어치우고 광산촌 설교자도 틀어지자 이번에는 고향으로 돌아와 과부가된 사촌에게 결혼을 졸랐다. 거부당한 후 자식이 딸린 매춘부와 동거를 하다 헤어진다. 동생의 권유로, 심기일전 벨기에에 있는 미술학교에 등록하지만 알 수 없는 이유로 퇴학처분을 당한다. 그나마 이 기간에 당시 유행했던 일본화풍에 영향을 받아 여백의 활용과 밝은 화풍을 도입한 것은 다행이었다. <프로방스의 시골길>이 그 예이다.
그는 전체 효과를 얻기 위해서 기성의 세부적인 묘사를 포기하였고, 그가 속한 인상주의 계보가 그랬듯 순간의 인상을 잡아내어 화폭에 담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게다가 눈부신 색과 강렬한 대조에도 불구하고 고흐의 그림은 <밤의 카페 풍경>에서 처럼 결코 천박하거나 벽보처럼 보이지 않는 까닭은 그의 천부적 색감의 배합에 힘입은 바 크다. 특히 어떤 소재가 지닌 본질과 특성, 그것이 주는 전체적 인상을 속도감있게 잡아내는 것에 힘을 썼다.
고흐를 말하면서 후기 인상파를 이루는 또 한명의 거장, 폴 고갱과의 프랑스 남부 아를에서의 공동생활을 빼놓을 수 없다 동생 테오의 주선으로 고흐의 노란집에 거처하게된 폴 고갱과 고흐는 한 눈에 서로를 알아본 고수였다. 참으로 많은 영향을 서로 주고 받았지만 그렇다고해서 노선까지 같이하는 천재 쌍둥이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고갱에게 그림은 자연에 있는 사물을 상상의 재결합을 통하여 표하는 물화적 행위였고, 이를 위해 대상을 단순화하고 원색을 이용하여 장식적 효과를 높였다. 장식성과 상업적인 요소는 다섯 아이의 아버지라는 부담과 빠른 성공을 위한 고갱의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것이다. 그에 비해 고흐는 고갱의 재구성을 억지와 과장으로 보았고 있는 그대로의 사물을 표하되 작가의 감정이입 방법으로 색과 터치라는 심화적 긴장을 강조하였다.
공동생활 두달째, 성탄절 이틀전 비극적인 사건은 일어나고 만다. 고갱과의 논쟁중 고흐는 흥분한 상태에서 자기 귀를 잘랐고, 그길로 사창가에 있는 매춘부에게 자신의 왼쪽 귀 조각을 건넨 후 정신병동에 강제 입원 당한다. 이때가 그가 죽기 7개월 전이었다.
오베르의 어느 들판, 귀없는 사내가 비척이며 걸어가다 자신의 가슴에 총을 쏘았다. 이틀 후 동생 테오가 바라보는 앞에서 “삶은 고행이었다”는 말을 남기고 마지막 숨을 거둔다. 가엽게도 그의 나이 37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