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수개월 동안 여러 병원에서 각종 피검사는 물론, 위장과 대장 내시경까지도 받았지만 모든 결과가 ‘정상’이라 나왔던 환자분이 기억난다. 당연한 얘기지만 여러 검사 결과에서 모든 지표가 정상이라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이 분이 한의원까지 내원하신 것은 본인의 몸 상태가 분명히 이상이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이 분이 호소하던 증상은 속이 늘 답답하고, 머리가 아프면서 머리 속에 꼭 안개가 끼어 있는 것만 같으며, 입맛도 없는데, 업친데 덥친격으로 최근에는 설사증까지 겹쳐 체중이 거의 3개월 사이 15kg이상이 줄었다고 하신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전에는 이런 적이 없었고, 무엇인가 큰 병이 생긴 것만 같아 이 병원 저 병원을 돌아다녀도 모든 검사 결과가 ‘지극히 정상’이라 하니 돌겠다고 하신다. 하지만 의사 입장에서는 검사 결과에 일단 아무런 이상이 없으니 무턱대고 아무 치료나 시작할 수는 없고, 그저 스트레스를 조심하고 잘 먹고 잘 쉬라며 계속 집으로만 돌려보낼 수 밖에 없는 상황…
환자 입장에서는 아무리 기운을 내려 해도 영 음식이 먹히지 않고, 억지로라도 무엇인가 먹을라치면 바로 설사가 심해지는 통해 오히려 안 먹는 것이 편한 상황이라 오히려 잘 먹고 잘 쉬는 것이 가장 어려운 일이 되어 버렸다. 상황이 이러니 혹여나 본인에게 잘 발견되지 않는 큰병이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고민에 깊이 빠져 있었다.
그래서 일단 병원에서 내시경까지 했어도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다면 우선 큰 병이 아닐 것이라며 안심을 시키고 진맥을 시작했는데, 일단 맥의 모양이 미끌거리고, 명치 조금 아랫쪽에 딱딱한 멍울이 잡힌다. 해서 그곳을 살짝 압박하니 환자가 자지러지는 비명소리를 낸다. 흔히 말하는 급체, 즉 체증인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진단에 환자는 어떻게 체증이3개월간 계속될 수 있냐며 다른 큰 병이 아닌가 재차 질문한다. 해서 큰 병이 아니라도 적절한 치료가 따르지 않으면 저절로 낫질 않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간단히 설명 후 자침을 하였다. 그렇게 십여분 정도가 지나니 머리가 점점 맑아지는 것 같다 하고, 30분 후 발침 이후엔 두통과 가슴이 답답한 증상이 거진 사라졌다 한다. 다시 명치 부근의 압통점을 압박하니 얼굴만 약간 찡그릴 뿐 소리는 지르지 않는다. 아직 남은 쳇기는 침으로 몇번 더 조절하기로 하고, 지난 3개월 사이 고갈되어 버린 기력은 한약으로 따로 보해줘야 할 것 같다 하고 본격적인 치료를 시작했다. 그리고 나서 체중을 포함해 몸이 완전히 아프기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는데 6주가 채 안 걸렸다. 한의학적 관점에서 보면 손쉽게 치료가 가능한 증세 였지만 현대의학의 관점에서는 원인을 찾지 못해 어이없이 병을 키워버린 경우라 하겠다.
이는 현대의학에서는 체증에 대한 개념 자체가 없기에 생기는 해프닝이라 할 수 있는데, 사실 체증이란 단순히 기운이 막힌 상태를 의미하기에 초반에만 제대로 대처하면 굉장히 빠르게 호전된다.
한의학에서는 이렇게 기운이 막힌 상태를 또 크게 식체(食滯)와 기체(氣滯) 두 가지로 구분한다. 식체(食滯)란 흔히 ‘체했다’ ‘얹혔다’ ‘더부룩하다’ 등으로 표현하는 음식을 급히 먹었거나 과식했을 때, 또는 먹기 싫은 것을 억지로 먹었을 때 잘 나타나는 소화기 관련 질환이고, 기체(氣滯)는 음식 자체보다는 불편한 마음으로 인해 ‘기가 막혀버림’으로 소화가 잘 안되고 속이 좋지 않게 되는 경우다. 그래서 직접적인 음식물이 위장에 가하는 부하가 원인인 식체에는 소화제 같은 치료법도 잘 듣지만, 기체의 경우는 그 원인이 음식이 아닌 마음에 있으므로 신체에 직접적으로 작용하는 현대의학적인 치료법들은 영 효과가 없다. 흔히 민간 요법으로 많이 행해지는 손가락 끝을 따는 행위가 바로 이 기체를 뚫기 위한 침법을 응용한 것이다. 반면, 기체가 아닌 순수하게 과식, 폭식 같은 물리적인 부하로 인한 식체의 경우는 손가락 끝을 따는 방법보다는 오히려 약국에서 파는 소화제가 훨씬 더 효과적일수도 있다.
일단 체기가 심화되면 구취와 함께 변ㆍ방귀에서도 기분 나쁜 냄새가 난다. 건강한 사람이라면 비위를 거쳐 소화된 음식물이 장에서 간으로 흡수되어 생명활동에 필요한 원기를 만든다. 그런데 기운이 막히면 간에 어혈(노폐물이 많고 정체된 피)이 생겨 제대로 흡수가 안된다. 흡수되지 않고 장에 남아있는 음식물은 영양이 많아 쉽게 부패되고 가스를 만들기 때문에 입에서 뿐만 아니라 변과 방귀에서도 심한 냄새가 난다. 이런 경우 식체와 기체를 동시에 풀어줄 수 있는 것이 바로 ‘진피’라는 약재로, 이는 노란 색의 귤껍질을 한방에서 부르는 이름이다. 귤은 그냥 먹고 껍질을 잘게 썰어서 햇볕에 바싹 말린 다음 잘 보관하셨다가 차처럼 사용하면 된다. 또, 체기가 그리 오래되지 않았을 경우에는 지실ㆍ대황 등의 약재가 들어간 탕약을 처방해 막힌 기운을 뚫어주면 2~3일 후 거짓말처럼 체기가 사라지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 환자처럼 만성화돼 묵은 체기가 있는 경우라면 당연히 치료에도 좀 더 긴 시간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