없이 살던 시절의 이야기이다. 지역과 출신을 떠나 우리가 60년대 또는 70년대에 어린 시절을 보냈다면 어릴적 늘 누런 코를 인중에 달고 다니던 동무의 기억이 우리에게 아마 한 둘은 있을 것이다. 언제나 훌쩍거려 소매가 빤질거리던, 어느 꽃그늘의 추억처럼 보편적 가난 아래 유년의 기억으로 아직도 남아있는 그 옛동무들, 그들은 과연 지금 어느 하늘 아래서 어떻게 늙어가고 있는지 모를 그런 단상말이다.
뜬금없지만 그런데 그 누런 코가 뇌의 노폐물로 여겨지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으로 보면 그 황당한 추정과 일반의 믿음이 1900년대 초에 들어와서야 비로서 바로 잡힌 것을 생각하면 실로 격세지감이다. 그러니까 그때까지도 양의 피를 뽑아 사람에게 넣어보기도 하고 오늘날의 식염수 대신 우유를 사람의 혈관에 넣어보기도 했다.
게다가 사람의 피를 뽑아 심한 출혈로 죽어가는 다른 사람에게 줌으로 어떤 경우는 살고, 어떤 경우에는 죽어서 의사들을 당황케했다는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 겨우 1900년대에 들어와서야 혈액형의 존재를 알아냈고, RH형의 피가 존재한다는 것은 1차와 2차 양대 대전을 겪으면서 알게 되었으니 거기에 또 무슨 말을 보태겠는가.
300여년만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면 더욱 끔찍하기로는, 전염병의 실체가 악마와 작당을 하여, 더 정확하게는 성교를 하여 빗자루를 타고 다니며 병을 퍼트린다고 여겨져 온갖 저주아래 죽게 된 마녀사냥이 또한 그 경우가 될 것이다. 또 더욱더 압권인 것은 인류가 최초로 망원경을 만들어 별을 관찰했을 때, 그들이 발견하리라 예견한 것은 멀리 깊숙히 의자에 앉아있을 근엄한 신의 모습이었다.
세월은 흘러 인류는 아폴로를 띄웠고 달나라의 월계수와 절구질하던 토끼설화를 없애버리더니, 우리가 채 늙어 죽기도 전에 고향은 없어지고 유년의 뜨락이던 초등학교는 어느덧 신동아 아파트 3차가 되어버렸다. 낯선 땅에 옮겨와 가정을 이루고 양육과 일용한 양식을 구하는 동안 우리모두 귀밑머리가 하얘졌다. 인터넷과 스마트폰등 우리가 그만큼 똑똑해진 것같지는 않은데, 동료의 천재성에 기대어 그 혜택은 받고 있는 것 같아 그저 죄송하고 아직도 생경스럽다. 세상이 바뀌면서 도대체 시인은 어디에 무덤을 두어야 하느냐던 어느 시인의 음울한 구절이 이제 100세 시대라는 바램과 믿음이 정말로 실현된다면 우리는 과연 자칫 지루할 수도 있는 우리 앞에 놓여있는 삶을 과연 어떻게 맞아야 하며 또 무엇을 준비해야 할런지 진지하게 생각해봐야 할 것 같다. 겨울도 이만큼 깊었으니 이제 다가올 봄도 정녕 가까이 있을터….
이번 주말에는 Chesapeake에 가서 웬지 Bay Bridge라도 넘어갔다 와야 될 것 같다. 허락된다면 그리하여 어쩌면 장려한 일몰도 마주할 수도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