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종

가끔 사람들은 아무것도 아닌 일을 무슨 큰 비밀스러운 일이라도 되는 듯, 숨기는 게 많다. 내가 남의 사생활에 꼭 관여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때에 따라서는 나이도 알아야 하고, 어디 사는지도 알아야 하고, 또 어떨 때는 결혼 여부, 또는 이혼 여부도 알아야 할 때가 많다. 어떤 남자가 전화를 걸어 대뜸 한다는 말이 “이것저것 묻지 말고 시민권 신청할 때 필요한 게 뭔지만 말하세요.”라고 한다. 이런 말을 들어야 하는 그 순간 기분이 몹시 나쁘다고 해야 하나? 나도 모르게 “모르니까 다른데 전화하세요.”라고 한 후 전화를 끊어 버렸다. 그러자 그가 다시 전화를 걸어와 “그런 걸 모른다는 게 말이 됩니까? 그리고 왜 전화를 끊으십니까?”라며 따지듯이 소리를 지른다. “당신 같은 사람에게 그런 내용을 설명하고 싶은 마음이 없어서 전화를 끊었습니다. 다른데 알아보세요.”라며 다시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다시 전화가 왔지만 나는 그 전화를 받지 않았다.

 

도움을 청하는 사람의 태도가 못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 묻지도 말고 알려고도 하지 말고 자신의 질문에 대답만 하라는 그 말 한마디, 알고 보면 별로 크게 마음 상할 일도 아니건만 어째 그 순간을 참지 못하고 전화를 끊었을까? 그러나 후회는 없었다.
주님께서는 ‘순종’하라고 하셨다. 그러나 인간인지라 순종에 대한 의미가 가슴에 들어오지 않는 순간이 많다.
어떤 분이 시민권 책 두 권과 CD 두 개 주세요.”라고 하기에 “똑같은 책을 왜 두 권씩이나 사세요?”라고 물었다. 그러자 “그런 건 알 것 없고 살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라며 따지듯이 묻는다. 몇 권을 사건 돈 주고 사 간다는데야 할 말은 없다마는 너무 무뚝뚝한 그의 말투에 은근히 마음이 언짢아진다. 나는 말 없이 책 두 권과 CD 두 개를 내밀었다. 그러자 그가 “사실, 제가 우리 교회에서 시민권을 가르치고 있는데, 여기 있는 책이 잘 되었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라며 묻지도 않은 대답을 하고 있었다. 다른 사람에게 가르치기 위해 사는 것이라면 그냥 줄 수도 있었으련만, 이미 내 기분을 먹구름으로 만들어 버린 탓에 아무 말 없이 돈을 받아 챙기고 있었다.

 

내가 많은 사람의 사연을 알아야 할 필요는 없겠지만, 그래도 물어야 하는 말이 있다면 물어야 하는 게 나의 일이다. 어떤 여자분이 ‘시민권 신청할 때 무엇이 필요하냐?’고 물었다. 여러 가지 필요한 서류와 준비할 것에 관해 설명한 뒤에 “혹시 두 분 중에 이혼 경력이 있으십니까?”라고 물었다. 그러자 그녀가 “그런 것까지는 아실 필요 없어요”라고 하기에, “그래요? 제가 알 필요는 없겠지만, 신청서에 그런 것들을 자세하게 기록해야 해서 물었습니다.”라고 했더니, “왜 그런 것까지 일일이 적어야 합니까?”라고 묻는다. “그런 것까지 제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이민국에서 하는 일인데요”라고 하자. 하는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결국 이혼 경력을 말하고 있었다. 그러면 전 배우자의 이름과 결혼날짜, 이혼날짜 그리고 사는 주소를 알아야 합니다.”라고 하자 “뭐가 그렇게 복잡해요? 그런 걸 기억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라고 말하는 목소리가 높다. 그냥 ‘알았습니다.”하면 될 것을, 나에게 목청을 높이는 것이 이해하기 어렵다. 그렇게 마음에 들지 않으면 나에게 따질 것이 아니라, 이민국에 가서 따져야 하는 것이 아닐까?

 

“영어를 잘 못 하는데, 시민권 시험 볼 때 어떤 사람이 통역을 쓸 수 있나요?”라고 묻기에. “지금 연세가 어떻게 되셨는데요?”라고 물었더니, “그런 것까지 알 필요 없고, 규칙만 알려 주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말만 하세요.”라고 한다. “나이를 알아야 알려드리지요.”라고 하자 “오십이 넘었습니다.”라고 한다.
사람들은 “남을 위해 봉사를 많이 하시니 항상 기쁘고 보람이 있으시겠습니다”라고 한다. 나는 속으로 기쁘고 보람이 있기는 뭔 얼어죽을 기쁨이고 보람이겠는가! 늘 어려움에 허덕이는 이들에게 도움을 주고자 하는 우리, 그러나 도움을 주고서도 자칫 잘못하다가는 원망을 들어야 한다. 할머니가 전화를 걸어 왔다. “우리 할아버지가 매우 아파요, 와서 좀 도와줄 수 있나요?”라고 하기에 “할아버지가 어디가 편찮으신데요?”라고 물었더니. “그런 건 알 필요 없고” 라고 한다. 아니 그걸 알아야 간병인이 필요한지, 도우미가 필요 지 판단을 할 것 아닌가 말이다. 그놈의 ‘알 것 없다’라는 말을 누가 만들어 놓았는지 속에서 꾸역꾸역 무언가가 올라오고 있는 내가 아직 부족한 것이 많은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