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청에다 여장을 풀었습니다. 예약도 없이 봉정암을 포기하고 소청 대피소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은 등반 중에 함께 말을 섞은 산객과의 대화중에 동료 세명이 갑자기 변심하여 불참하게 되었다는 정보를 입수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가이드의 집요한 노력 끝에 얻어낸 승리의 산물. 관리 요원 거절의 서슬이 푸르디 푸르더니 동원된 학연 지연 혈연 금전 등의 공세에 허물어져버리는 원칙. 부끄러워 해야할 우리나라의 현실. 그러나 부끄럽게도 내가 그 부끄러운 혜택을 받아 소청에서 머물게 되었습니다. 찬서리 어께에 촉촉하게 내리는 소청의 식탁에서 길에서 만난 산동무들과 저마다 가져온 술 다 꺼내놓고 마시니 한참을 즐깁니다. 안주에 식단도 다양해졌고요. 관리인이 소등을 주문할 때 까지 설악의 익어가는 밤을 고래 심줄로 지키다 마지 못해 숙소로 기어듭니다.
밤은 잠시. 우리에게는 새벽도 낮이어야 합니다. 새벽 4시부터 일어나 주섬주섬 준비하고 길을 나섰지만 어느새 5시. 어둠을 헤치며 다시 중청으로 오르다 회음각 대피소로 빠집니다. 비록 거의 하산 길이지만 서리에 젖은 돌길이 더욱 위험한지라 아주 몸을 사리면서 확인하고 내려오는 미국 친구의 느린 걸음 덕에 우리는 너무 자주 쉬며 기다리게 됩니다. 이렇게 무리해서라도 새벽을 깨며 산행을 시작하는 이유는 새벽은 아무리 어두워도 이내 아침이 열리지만 늦은 오후에 시간관리를 잘못하면 더우기 밤이 일찍 찿아드는 산에서는 낭패를 보기가 십상인지라 그리한답니다. 자욱한 안개 속에 희미하던 산세가 점점 또렷해 질 무렵에 희운각 대피소에 다다랐습니다. 다소 느긋하게 시간을 갖고 아침을 준비합니다. 이제부터 마의 공룡능선을 넘어야하기 때문에 밥심으로라도 걸어야겠죠. 그저 비슷비슷한 고개를 셀수 없이 넘으니 마치 공룡의 등과 같이 이어져있다고 붙여진 이름. 이젠 다 넘었겠지 하면 또 다시 나타나는 얄미운 공룡능선의 고갯길. 그만큼 힘든 코스이기도 하지만 또 설악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광을 선사하기도 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안개를 비집고 새어드는 설악의 아침햇살이 성스럽게 여겨지기 까지 합니다. 참으로 미려하여 한없이 행복해지는 순간입니다. 지난 조국 명산 순례 트레킹 10 여일 중변치않고 이어지는 맑은 날들. 함께한 외국친구들에게 우리의 금수강산을 마음껏 뽐내라는 하늘의 격려인 양 그간 비 한번 내리지 않고 창천벽해의 아름다움을 고스란히 주셨답니다.
아침햇살에 비끼는 수많은 암봉들이 서로들 어서 오라며 손짓을 합니다. 참으로 수려한 길입니다. 쉴새 없이 오르고 또 넘어도 한 고갯길 한 산자락 휘돌아가면 또 다시 풀어놓는 저마다의 풍경 하나. 힘든 여정의 백신 같은 존재입니다. 이런 황홀경에 빠져 걷다 보니 내가 산을 넘는 것인지 산이 나를 넘겨주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아주 멀리로만 여겨지던 암봉들이 이제 바로 지척에 있고 최고봉도 어느새 눈높이에 있습니다. 어디서 출발 했는지 부지런한 발길을 몰고오는 일행들을 자주 조우하니 반가운 인사로 맞이하고 격려로 보내드립니다. 점점 부상하는 해가 비쳐주는 암봉들은 시시각각으로 변신을 거듭하며 부지런히 옷을 갈아입습니다. 포근한 기류. 마치 사랑하는 이의 품에 안긴듯 행복합니다. 이미 급하게 모두 하산한 가을 때문에 능선의 수목들은 벌써 나신이 되어버렸고 색채감마저도 없는데 산허리를 돌다 눈에 가득 차는 화려한 색상의 군무. 산철쭉이 활짝 웃고 있었습니다. 연일되는 이상기온 탓에 다시 봄이 온줄 알고 황망하게 꽃망울을 터트려버린 철쭉들. 이 수묵화의 풍경속에 현란한 색으로 한 부분이 그려지니 더없이 아름다운 그림이 완성됩니다. 비록 기나긴 가뭄에 단풍으로 불태우기도 전에 말라버려 낙하한 가을잎들이 서럽고 안타까웠지만 말입니다.
마침내 마등령에 당도하고 다시 지리한 하산길이 수시간 이어질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 모두의 식수가 고갈된 상태입니다. 충분히 챙기지 못한 뒤늦은 후회를 하며 마지막 남겨둔 소량의 물을 함께 나눠 목을 축이고 비선대로 날아가기를 결의합니다. 도저히 못참아 중도에 손을 내밀어 물 구걸을 한번 하긴 했지만 말입니다. 그래도 느닷없이 나타날 신기루 같은 수원지를 상상하며 하산속도를 두배로 내어보지만 허튼 일. 알티미터에 600미터 정도 찍힌 지점에서 발길이 멈춰집니다. 다시 수려한 단풍들이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황량한 정상부분의 풍경만을 보아오다 재회한 단풍의 물결. 더없이 반가울수 없고 아름다울 수가 없습니다. 부지런히 시선을 돌려 올해 마지막 가을을 즐기려 노력합니다. 역광으로 비치는 선명한 단풍잎 그늘에 서서 그 빛에 물들고 싶어 가만 가만한 숨을 참아도 봅니다. 후각으로도 전해오는 설악의 색채. 아름답기 그지 없습니다. 금강굴 드는 갈림길에 이르러서는 인파들이 곱게 차려 입은 총천연색의 등산복이 보태지니 그야말로 색의 향연. 온산이 무지개 색으로 칠해져 있었습니다. 사람사는 세상으로의 귀환. 안도감과 함께 이제 살만하니 사람사는 노릇도 해보고 싶더이다.
선녀가 올랐던 신선이 승천하였던 별 의미는 없지만 옥수에 비치는 비선대에 비치는 설악의 가을 풍경은 옥황상제라도 탐하여 내릴 듯. 거울처럼 투명한 물에 비치는 산빛이 너무도 곱습니다. 비선대 산장으로 한달음에 달려가 막무가내로 이빨마저 시릴 맥주 한병을 나발불며 해갈을 하고 제정신으로 돌아와 늦은 점심을 주문합니다. 더덕 막걸리에 강원도 감자전. 감춰진 허기를 어찌 이것으로 풀어주겠으랴만 물빛 가을빛 고운 산에 안겨 잔을 거듭하니 이내 신선이 되고 세상사를 망각하게 됩니다. 기나긴 여정을 한 시름으로 풀어놓는 시간. 아름다운 계절이 마지막 취흥으로 더욱 찬연하게 채색을 합니다. 오늘만큼은 숙소에 돌아가 가을 향기 담뿍 마시며 노천욕을 즐기다 식지않은 몸을 이끌고 바다로 가고 싶습니다. 간판마저 빛바랜 어느 비릿한 속초항 후미진 선술집에서 때뭍은 도마에다 대고 쓱쓱 썰어주며 갖은 욕을 구성지게 퍼부어대던 할머니 횟집을 찿아나서려 합니다. 같이 잔 나눌 술친구 만나면 금상첨화이겠고 그렇지 못하면 혼자라도 기꺼이 한잔 거나하게 취해보고 싶은 심정입니다. 그런 마음이 앞서가는 비선대에서 바라보는 산그늘 잎그늘이 곱게 지는 스산한 가을 날 어느 늦은 하오의 설악이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