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년만에 이루어진 남북 이산가족 상봉행사가 하필이면 우리가 머문 숙소에서 행해져 분주한 발길과 환희와 오열의 목소리 그리고 방송매체들이 밝혀논 조명 때문에 그리 편안한 밤을 보내지 못한채 설악으로 향합니다. 관문 용대리에서 황태구이와 백담 순두부에 주인장의 마음이 담긴 강냉이 동동주 한잔 걸치니 힘이 새로이 솟아나는 느낌. 아슬아슬한 낭떠러지 고갯길을 시골버스는 곡예를 부리며 돌아가는데 근심이 들기 보담은 오색 단풍에 마취되어 가게 된길. 백담사 가는 길. 역사에 황칠을 한 한 난폭한 군인하나가 순백의 물이 고인 백삼사를 오염시킨 바 탄식하듯 전해오는 만해의 침묵의 목소리를 듣습니다.
갈길 멀어 정신없이 평지길을 달리다시피 하니 쉬어가라는 듯 수렴동 계곡이 화사하게 치장을 하고 우리를 맞이합니다. 대청에서 내려온 가을이 수렴동에 모여 핏빛으로 불타고 계곡물에 담근 손마저 노오랗게 물들어 버립니다. 산빛이 그대로 투영된 물을 바라보니 어느새 마주한 얼굴에는 수줍음의 홍조가 번진답니다. 유장한 폭포수가 고여 만든 소에는 가을 낙엽들이 켜켜이 쌓여있으니 이내라도 천사가 하강하여 멱을 감을까하여 기다려집니다. 아침햇살에 비끼는 계곡의 단풍은 참으로 미려하기 한이 없습니다. 단풍색에 매료되어 저 산허리를 돌아가면 또 어떤 색으로 나타날까 하는 조바심에 발길이 급해지고 봉정암에 오르니 겨우 늦은 점심 무렵. 일단은 사찰에서 공양으로 제공하는 미역국과 김 주먹밥으로 오찬을 즐기고 우리는 망연하게 생각마저 멈추고 있었습니다. 오늘의 숙소가 이곳인데 소청에서 꺾어 공룡능선을 타는 내일 일정에 오늘 대청까지 올라 되돌아오기도 조금은 난감하고 그렇다고 하릴없이 봉정암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기도 그런.. 대청까지 진군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런 뒤 중청이던 소청이던 대피소를 이용 숙박하기로.. 막무가내식이지만 운에도 기대어보기로..
오늘도 변함없이 산안개 자욱한 설악의 정상부입니다. 골마다 계곡마다 자욱한 안개. 소청 마루에서 바라보는 공룡능선은 그야말로 운해위 점점이 흩어진 섬들과 같습니다. 신비로움이 더하는 정상 가는 길. 구름 타고 올라오던 대들을 밟고 오르던 두발로 걸어 올라가던 허공을 밟고 오기는 마찬가지이며 신선이 되기는 매양 한가지 인듯 여겨지는 순간입니다. 중청을 거쳐 대청으로 오르는 돌산 깔딱고개길에는 선남선녀들의 소박하고도 허다한 바램 수많은 사연들이 수북한 돌무덤의 탑으로 쌓아 염원하고 있습니다. 너무도 간절한 듯도 하여 그 소망 이루어지길 그들을 위하여 더불어 합장을 해봅니다. 어쩌면 넘는 힘겨운 이 고개길 잠시 쉬어가려는 지혜인지도 모릅니다. 우리도 잠시 발길을 멈춘 채 돌하나 탑위에 올려놓고 한숨을 돌리며 우리가 걸어온 길들을 더듬어 봅니다.
너덜지대와 바위 뿐인 저길을 바라보며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새로이 담았는지 되돌아봅니다. 양대가 적선해야 볼수 있다는 내설악의 짙은 운해가 가득합니다. 바람의 맛이 다릅니다. 옷깃을 여미게 하는 칼바람이 매섭게 불어옵니다. 한번씩 변하는 세찬 바람에 연출되는 구름의 움직임이 예사롭지가 않습니다. 끝청 아래에 짙게 펼쳐진 운해. 함께 손 맞잡고 천불동계곡으로 넘어가려던 사랑의 도피는 높은 중청마루에 걸려 찢어지고 그들은 차마 생과 사의 끈을 놓지 못해 돌이 되어 그리움으로 남습니다. 세상에서 몇째 가라면 서러워 할 설악 대청봉의 해넘이의 장관을 보기위해 끝없는 산객들의 방문이 이어집니다. 일망무제 대청봉. 바람이 먼저 나와 배웅을 합니다. 좁은 바위 정상에 제법 많은 외국인을 포함해서 정상 표지석에서 기념사진 촬영을 위해 줄을 서 기다립니다. 어디서 출발을 했던 모두 힘들고 기나긴 여정 이었을텐데 이 순간 만큼은 희색이 만면합니다. 목표를 달성한 그 마음 뿌듯함이겠죠. 우리도 한컷의 인증샷을 날리고 석양이 지는 곳으로 몸을 향합니다. 일진광풍이 불어와 세속에서 본의 아니게 쌓여진 풍진을 털어주고 지나갑니다. 구름위에 뜬 공룡능선은 석양에 비껴 불타며 쓰러집니다. 이같은 천하제일경을 내려보며 정상주 한잔 권하니 내가 신선인듯 네가 도인인듯 설악은 이렇게 나의 범속을 비범함으로 승격시켜 줍니다. 바로 이 곳이 사바세계 벗어난 극락인데 붉게 뭉실대며 구름은 무심하게 끝없이 피어오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