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먼 옛날, 어느덧 30년이 되었나 보다. 결혼기념일을 맞아 남편과 2박 3일의 일정으로 라스베이거스로 여행을 떠났다. 처음 간 라스베이거스, 우리는 복잡한 시내를 벗어나 한적한 시골길을 걷고 있었다. 그때만 해도 운동화에 적응하지 못했던 때, 구두에 몸을 의지하고 사람도 뜸한 라스베이거스의 외진 곳을 걸어가다 그만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누구나 그렇듯이 길에서 넘어지면 아픈 몸보다 더 먼저 ‘누가 본 사람 없나?”라며 주위를 살피는 게 인간의 본능인 것 같다. 아픈 다리가 우선이 아니었는지 나도 모르게 얼른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행히 주위엔 아무도 없었고 곁에 남편만 서 있었다. 겨우 몸을 일으켜 세웠을 때, 어느 남자가 홀연히 나타나 내 구두를 들고 서 있었다. 그리고 그는 아무 말 없이 왼쪽 다리를 꿇고 오른쪽 다리를 세우고 내 앞에 앉아 구두의 안과 밖을 손으로 털고 닦아내고 있었다. 너무 놀란 나와 남편은 물끄러미 그의 행동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가 구두를 한쪽에 놓더니 이젠 넘어진 왼쪽 다리를 자신의 손에 받쳐 들고 나의 발등을 털어내고 발밑을 꼼꼼하게 닦아주고 있었다.
그리고, 나의 발을 꿇은 자신의 다리 위에 놓은 후, 나를 바라보며 “Are you okay?”라고 물으며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청바지에 줄무늬가 있는 남방셔츠를 입었고, 밤색 재킷을 걸치고 있었으며 어깨까지 내려온 짙은 밤색 머리에 짧은 구레나룻이 햇빛에 반짝이고 있었다. 그리고 나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청명한 하늘처럼 맑고 고왔다. 내가 “괜찮다.”라고 말하자 그가 나의 발을 구두에 신기고 조심스럽게 나의 발을 땅 위에 내려놓았다. 그때야 남편이 나의 팔을 잡아주었다. 나는 남편을 바라보았고 남편도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인사하려고 고개를 돌렸을 때, 그 사람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그 남자 어디로 갔지?”라고 하자 남편이 “어? 그러게 어디로 갔지?”라며 둘이 사방을 둘러보았지만, 그는 그곳에 없었다. 그렇다고 건물이 있는 곳도 아니오, 사람이 있는 곳도 아니었다. 정말 아무도 없는 평평한 대지 위에 그는 어디로 갔는지 사라지고 없었다. 남편과 나는 걸어가면서 자꾸 뒤를 돌아보았지만, 그를 찾을 수 없었다. 남편이 “거 참 이상하네, 귀신이었나?”라고 하였다. 그야말로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는 말이 이럴 때 쓰는 말이었나 보다.
30여 년이 되었지만, 나는 가끔 그를 생각하였다. 그는 어찌하여 낯모르는 여자 그것도 남편이 곁에 서 있는데도 아무렇지 않게 무릎을 꿇고 앉아 낯선 여자의 발을 그렇게 정성스럽게 털어주고 닦아주었을까? 그리고 그는 어디로 사라져 버린 것일까? 생각해 보면 그는 나를 찾아주신 주님이었을 것이다.
지금은 고인이 되었지만, 양로원에 계시는 할머니를 방문했을 때, 누군가가 할머니에게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아휴, 더럽게 이렇게 똥을 싸면 어떻게 해? 비위 약해 죽겠는데 이 냄새를 어떻게 하라고?”라며 할머니를 닦달하고 있는 여인, 그 여인은 바로 할머니의 며느리였다. 할머니는 눈을 감고 있었고 며느리는 소리 지르고 있었고 아들은 어찌할 줄 몰라 천장만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며느리를 밀어냈다. 그리고 종이 수건으로 할머니의 대변을 치워주고 침대 시트를 새로 깔고 몸을 닦은 후, 잠옷을 새로 입혀주고 이불을 새로 덮어주었다. 며느리는 냄새난다고 한쪽 곁에 앉아 코를 막고 있었지만, 나는 아무런 냄새를 맡을 수 없었고, 대변이 별로 더럽게 느껴지지 않았다. 할머니를 제 자리에 다시 뉘었을 때, 할머니가 나의 손을 잡으며 “고마워, 정말 고마워,”라고 말씀하시며 나를 쳐다보는 할머니의 그 눈길은 천사의 모습이었다.
자주 찾아뵙던 할머니 한 분은 어느 날 사탕 한 알을 까서 나에게 건네주었다. 나는 사탕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할머니가 주는 사탕을 덥석 입으로 받아먹었다. 그리고 방문을 마치고 나오는데 할머니가 “내가 준 사탕 먹어줘서 고마워.”라고 하시던 그 말씀이 가슴에 깊숙하게 파고들었다. “할머니가 주신 사탕이 다른 사탕보다 더 맛있었어요.”라고 하자 “고마워.”라고 하시며 내 손을 잡아 주시던 할머니, 같이 간 어느 자매가 “언니 정말 존경스러워, 나는 비위가 약해서 쓰리게 통에 버렸어.”라고 하였다. 생각해 보면 똥도 더럽고, 손으로 조몰락거린 사탕이 감지덕지 고마워서 받아먹은 것은 아니다. 사탕은 나에게 건네온 사랑이었을 것이다.
그렇다. 예수님은 내 발이 예쁘고 깨끗해서 닦아 주신 것이 아니라, 작은 돌 하나가 내 발을 찌르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 사랑을 베풀어 주신 것이다. 보이는 것은 더러운 것이 아니라 더럽게 보는 그 마음이 더 더러운 쓰레기는 아닐까?
누구를 만날 때마다 라스베이거스에서 만난 예수님을 생각한다. 그분의 맑고 고운 눈동자. 자신의 손으로 낯선 여자의 구두를 닦아주시고 발을 털고 쓰다듬어 주시던 예수님, 내가 많은 사람을 만나고 그들의 마음을 읽어주는 것은 내 마음에 있는 사랑이 있어서가 아니라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사랑이 내 마음속에 자리하고 계심이리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