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송나라때 오조 법연이라는 선사가 있었다. 선문답에서 거울이 삼라만상의 상을 맺은 후 거울은 과연 어디에 존재하는가라는 선문답에 상을 맺고도 거울은 만상 어디든지 존재한다고 하여 유일하게 스승의 선문답을 통과한 바로 그 법연스님이시다. 호랑이 아비에 개자식 없다고 법연 선사의 문하에 특별히 배움과 닦음이 남다른 제자 세명이 있었는데 혜근, 청원, 극근스님이 그들이다.
겨울을 코앞에 둔 어느날 이었다. 법연선사가 세명의 애제자와 밤길을 밝혀 산길을 내려오다 가랑잎 솓구치는 바람에 그만 등불이 꺼져버렸다. 사위는 칠흑같았고 발밑엔 천길 낭떨어지요 큰 짐승이 있던 시절이니 생사를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법연선사가 제자들의 수행을 가늠할 겸 자신의 두려움도 떨칠 요량으로 자 이제 어떻게 하여야 하느냐라고 어둠속에서 제자들에게 물었다.
첫번째로 혜근이 그들이 처한 상황과 느낌을 말했다. 광란하듯 채색 바람이 춤을 추니 앞이 온통 붉사옵니다(彩風舞丹霽) 하였고, 두번째 청원은 쇠뱀이 옛길을 가로질러 가는 듯 하옵니다(鐵蛇橫古路) 하며 뜻모를 말만 추상적으로 말하였다. 그런데 마지막으로 대답한 극근의 말이 걸작이었다. 우선은 불을 비추어 발빝을 봐야할 것입니다. 이른바 조고각하(照顧 脚下)의 현답을 추려내는 순간이었다 .
그 때까지 아마도 답을 가지고 있지 않던 노승의 눈매에도 미소가 돌고 얼굴까지 환해지는 그런 순간이었을 것이다. 대부분의 선문답이 그렇듯 우문과 현답이 혹 현문과 우답이 아니 적어도 범인들에게는 그렇게 들리는 즉, 차원의 배합과 절묘를 이루어 느닷없이 정곡을 찌르고 지극히 실용에 바탕한 것이나 거기에는 범접할 수 없는 직관과 우선 순위가 있어 그리하여 우리 모두 무릎을 치고 혀를 차게하는 통찰의 꼭지점 같은 일회전이었다.
흔히 산사에 가면 법당이나 승방에 신발 벗어놓는 댓돌 위에 조고각하(照顧 脚下)의 글귀가 걸려 있다. 좁혀 해석하면 신발을 잘 벗어 놓으라는 가르침도 되겠지만, 아마도 그보다 더 큰 섭리가 어려있을 듯 싶다. 법연의 시대가 지나도 깨달음은 계속된다.
시대를 달리하여 한 수좌가 선사에게 “달마가 서쪽에서 온 뜻은 무엇입니까(如何是祖師西來意)?” 하고 물었다 이에 그 선사가 대답하신다. “불을 비추어 네 발 밑을 보라(照顧脚下).” 수좌는 거창하게 구도의 근본을 물었지만 대답은 지극히 소박했다. 필경 스스로의 형편과 처지를 먼저 알라는 말이 될 것이다.
도는 의외로 눈감은 후 기침소리처럼 바로 그 눈 앞에 있을지도 모른다.
두루뭉실 대학으로 풀이하면 <수신제가 치국 평천하>로도 볼 수 있고, 소크라테스 언어로는 <네 자신을 알라>가 될 것이며, 성경으로 말하면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로 까지 외연시킬 수 있을 것이다.
세상은 언제나 그렇듯 흉흉하다. 광명성이 올라간 후 세상은 그 이름이 뜻하듯 더 밝아진 것이 아니라 훨씬 어두어졌다. 남북관계는 통일대박을 외치다 별안간 버르장머리를 움켜 잡았고, 개성공단에 빗장을 걸어 속사정 끄댕이와 마구잡이 멱살잡이로 치닫고 있다. 본디 한 몸에서 나왔으나 이제는 영락없이 콩깍지를 사르고 태워 콩을 삶고 있는 형국으로 거기에 빙충맞게도 이웃들이 빙글거리며 팔짱을 낀채 불을 쬐고 있다.
실로 밖에 나와 사는 우리가 봐도 씁쓸하며 불안하기 짝이 없는 안타까움으로 깜깜한 밤중에 마주하여 다가가는 두 범선을 보는 듯하다.
돌이켜 보자 이 모두 실은 칡과 등나무가(葛藤) 얽혀 있는 같은 문제일 것이다. 거울이 상을 맺고 어디로 사라지는 것이 아니듯 우리 서로 한번쯤 우리들의 발밑을 비추어 보는 그런 조고각하(照顧 脚下)의 책임은 우리에겐 도대체 없는 것인지 남의 눈만 찌르고 현상만을 탄할 것이 아니라. 우리 한번 차분하게 셈하고 생각을 굴려봄도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의무일 수 있다.
조고각하(照顧 脚下) 그것이 꼭 불문의 가르침만은 아닐 것으로 나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