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가을. 황금빛 갈대와 억새가 물결을 치고 불타듯 익어가는 단풍이 만산에 가득한 우리 산하를 아스라한 옛 추억을 더듬으며 품에 안긴 3대 명산의 이정. 물새소리에 제주의 새벽은 열리고 조는듯 외롭게 서있는 신작로의 가로등이 더욱 희미해질 때 우리는 여명을 헤치고 성판악으로 달립니다. 남한 최고봉 한라산을 등정하기 위해서입니다. 8시간은 족히 걸어야 하기에 아침을 든든하게 전북죽 한그릇으로 채웁니다. 팬션 아래 식당을 겸하고 있는 초로의 부부로 전복과 몸국을 주 메뉴로 하며 시나브로 들리는 손님들을 맞아 삶을 경영해 나가나봅니다. 허접한 야채도 넗지않고 굵직하게 썩뚝썩뚝 썰어 넣은 전복이 풍성한 한 사발. 정으로 우려 껄죽한 찹쌀과 오도독 씹히는 전복. 그리고 톳나물 무침으로 든든하게 배도 채우고 양기를 충전시켰습니다.
한라산을 오르는 길은 크게 다섯 방향이고 돈내코. 영실. 어리목과 세인들의 사랑을 제일 받는 관음사와 성판악 탐방로가 바로 그것입니다. 원래 계획된 코스는 성판악에서 꾸준히 올라 산마루를 두어번 넘는 관음사 쪽으로 내려오며 계곡의 유장한 물과 고이 물들어가는 단풍을 감상하기로 했었는데 최근 발생한 관음사 코스의산사태로 인하여 폐쇄된 바 그냥 성판악 왕복으로 가닥을 잡았습니다.
초입 입간판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트레킹 폴을 높이 들어 파이팅을 외칩니다. 대형버스가 줄지어 주차되어 있고 주차장이 넘쳐 도로 갓길에도 장사진. 이름값을 하는구나 인정하며 산행을 시작합니다. 나무 보드로 잘 정비된 길을 조금 오르다 보니 이내 한라 특유의 검은 돌밭길이 시작됩니다. 초반 4킬로미터의 대피소 까지는 완만한 경사로 이어지는데 돌길은 그 어려움을 더욱 느끼게 만들어 줍니다. 더우기 속력을 낼수 없는 것은 수학여행을 나온 고2년생들이 길을 메우고 있으니 그저 흘러갈수 밖에.. 산사랑이 유별난 우리 한국인들이 만들어 내는 특별한 모습입니다. 아직 내리지 못한 가을은 어디있는지 푸른 숲들과 그 아래에는 산죽들이 무성하게 가득 채우고 있습니다. 즐길 풍광도 없고 그저 묵묵히 나 자신과 대화하며 걷는 나만의 시간이 무려 3시간 가까이 이어집니다. 사라오름 분기점을 지나고 진달래밭 대피소를 지나 무려 1800 고지에 이를 때 까지 말입니다.
비지땀을 쏟으며 오르는데 길이 갑자기 가파라진다 싶더니 바람도 심상치 않습니다. 그저 옷깃을 여미게 하더니 한기가 가득한 바람은 결국 준비해간 방풍 자켙을 배낭에서 꺼내게 합니다. 계단으로 이어지는 기나긴 도정의 정상이 저만치서 보입니다. 허벅지가 묵직해지는 경사도를 느낍니다만 발걸음은 새털처럼 가볍습니다. 이제사 맘놓고 터보이는 제주의 풍경이 발아래 가득 펼쳐져 보이니까요. 서귀포의 아름다운 자태. 멀리 구름과 맞다은 태평양. 제주의 지붕에서 잠시 하늘이 허락한 가운데 명경 감상을 즐깁니다. 그도 잠ㅅ. 매서운 바람이 가만 두질 않습니다.
다시 마지막 구간 등정을 위해 발걸음을 옮기는데 세찬 바람은 우리를 날려버리기라도 할 작심을 한 듯 몰아칩니다. 체중이 덜한 사람들은 정말 유의해야할 위험구간인듯 합니다. 등산로 보수 중이라 난간도 없는 가파른 돌길. 모골이 송연하고 긴장의 땀이 손에 베입니다. 상대적으로 긴 외국 산동무들은 더욱 주눅이 들어 한발한발 옮기는 곳이 여간 불안해 보이지가 않습니다. 한국산은 다 이러냐고 불안한 속내를 감추지 못한채 물어옵니다. 걱정말라고 이 한라만의특이한 모습이라고 안심을 시켜주고 정상에 이릅니다.
일진광풍. 정말이지 미친듯이 불어닥칩니다. 일년에 고작해야 60일 정도 백록담을 감상할수 있는 일기를 허락한다는 귀한 기회가 오늘 주어졌음에도 우리는 서둘러 인증샷을 날리고 하산을 서두릅니다. 추위와 바람에 떨고있는 거구의 미국친구들이 너무 안스럽습니다. 그래서 내려오다 바람이 잠시 꺾어 가는 골진 곳에 터를 잡고 늦은 점심으로 준비해 간 도시락을 함께 먹습니다. 취사를 전혀 허락치 않아 따신 국물없이 먹으려니 별반 달게들 먹지 못합니다. 그래도 장도의 고행길에 시장했는지 톳을 넣은 밥에 해초무침과 장아찌 만으로도 주섬주섬 잘 먹습니다. 어색한 젓가락질과 함께 말입니다. 돌밭길에 주눅이 든 미국친구들의 거북이 걸음에 선두와의 도착 시간이 2시간 이상이나 나버리고 마지막 주자가 당도할 즈음에는 이미 어둠이 가만 내릴 즈음이었습니다. 먼저 하산한 이들을 달래려 막걸리 두어병에 도토리 묵 무침을 주문해 한담으로 기다림의 시간을 죽입니다. 한잔의 취기에 사시나무 떨듯 준비되지 않은 추위에 놀란 영육을 달래며 아늑한 밤을 맞이합니다.
지치고 추위에 떨었던 노고를 치하하며 저녁은 따뜻하고 얼큰한 김치찌개와 된장찌개 그리고 제주 특산 흑돼지 바비큐로 마련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제주도 기관에서 발행해준 한라산 등정 certificate 를 하나씩 받아들고 힘들었던 지난 시간에 대한 보상을 얻습니다. 마냥 기쁜 어린아이들 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