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북동부 트레킹 후기. 4 오색 단풍의 화이트 마운틴.

인생 살만큼 산 나이에 그 기쁨을 알기에 이어지는 오르막에도 불평 없이 즐거움으로 여기며 산을 오릅니다. 한참을 오르니 주변이 제법 트인 전망대가 나옵니다. 급하게 올라채는 비탈길에 그 핑계로 쉬어갈 수 있는 조망터가 그리 반가울 수가 없습니다. 발아래 바람과 구름이 숨바꼭질하는 낯선 풍광을 보며 잠시 숨을 고릅니다.

정상에 올라 내 삶의 길이를 재어보고
얼마나 올랐을까? 전망이 환하게 트이며 나지막한 관목들이 가득 초원처럼 채워진 프랭코니아 능선의 아득한 길이 눈앞에 펼쳐집니다. 유달리 강한 바람과 급격한 온도변화 때문에 다른 지역의 절반밖에 되지 않는 1500미터 고도에서 벌써 수목 한계선은 시작됩니다. 한눈에 모든 것이 가득 차니 이정표 같은 특별한 표식도 없습니다. 다만 따뜻하게 와 닿는 햇살과 더 시원하게 이는 바람이 높이를 느끼게 할뿐, 이리 높이 올랐는데도 하늘은 더욱 푸르게 더 높아져 있습니다. 한 구릉을 올라가니 손에 잡힐 듯 저편에는 바람에 벗겨진 맨살 바위의 라파에트 산 정상이 어서 오라 손짓하는데 이제부터는 몸을 가누기조차 힘든 세찬 바람이 간단없이 몰아쳐옵니다.
바람과 한판 승부를 펼치는 순간입니다. 꺾어져 나뉘는 갈림길에는 어김없이 돌탑이나 돌무덤들이 만들어져 있습니다. 정말이지 동서양을 막론하고 산길에는 스쳐 지나간 수많은 사람들의 손길과 마음을 모은 돌탑들이 나이테처럼 곳곳에 쌓여 있습니다. 비좁은 마음에 과다한 소망이 가득 들어서면 우리 산객들은 조그만 돌탑을 쌓으며 크고 작은 욕심과 헛된 소망을 내려놓는데 그러기에는 이처럼 산자락 후미진 곳보다 더 미더운 곳이 있을까? 어디로 가야하는지 무엇을 내려놓고 무엇을 취해야 하는지.. 내안에 들끓는 질문과 그 회답들마저도 비워버릴 수 있는 산.
우리는 팍팍하고 꿀꿀한 이민생활에서 삶이 무척 고달플 때 산을 향해 묻고 또 물었습니다. 그 숱한 방황의 갈림길에서 흔들리지 않고 살아올 수 있었던 것은 산을 오르내리며 자연으로부터 깨달은 이치를 터득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드디어 정상에 올라 바람과 마주하며 상념에 잠깁니다. 차라리 아무 말이 없는 묵상함이라 해도 좋겠습니다. 그 긴 침묵 속에서 안온함이 느껴지면서 짧지 않은 7일간의 여정을 되돌아보고 또 내 삶의 길이를 재어봅니다. 나는 어디서 와서 어디에 머무르며 또 어디로 가야 할 것인가? 이런 생각의 정리를 통해 재충전된 에너지와 함께 되돌아가는 일상이 아마 부드럽게 이어지리라 여기며 웃음으로 하산을 서두릅니다. 바람의 땅, 화이트 마운틴 명산의 정상에 서서 새로운 시작을 외치며 세상을 향한 자신감으로 크게 포효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