팍팍한 삶이 등을 떠밀어 나선 길. 그 길 끝에는 산이 있어 산을 만납니다. 조급한 마음에 마냥 기다릴 수 없어 달려온 길. 그 길 끝에 산이 있고 이미 마지막 불타는 단풍을 만납니다. 뜨거운 나날을 보냈던 분주한 나날들, 문득 주위를 돌아보니 온 세상이 어느덧 가을 물이 들어있습니다. 메마른 마음에도 실바람이 불어오고 살아있는 모든 것들을 흔들리게 하는 계절, 바람의 땅으로 길을 나섰습니다. 미 동부의 최북단. 메인 주. 하루 온종일을 내달려도 닿기 힘든 거리. 머나먼 길입니다. 그래도 그 길이 머지않아 여겨지는 것은 미국인들이 다시 찾기를 원하는 국립공원 중 첫손가락에 꼽히는 아카디아가 이 가을 어떤 찬란한 색을 입고 있을까 하는 조바심과 설레임 그리고 그 기나긴 기다림 때문이었습니다. 찻길 주변으로 펼쳐지던 자연의 색이 조금씩 북상할 때마다 더욱 원색으로 선명하게 발하고 있었고 기다리지 않았어도 어느새 북국엔 가을이 깊게 스며있었습니다.
남부 해안에서는 도저히 볼 수 없는 깎아지른 절벽들이 좌우로 펼쳐지고 해안선을 달리는 우리의 애마는 시종 흥겨움에 들썩거리는데 멀리 수평선이 아득한 대서양은 더욱 푸르고 깊어진 하늘 품에 안겨 잔물결 하나 일렁이지 않고 안온하게 잠들어 있습니다. 바다에서 뭍으로 달려온 가을이 산으로 올라 온천지를 불태우고 있습니다. 추운 지방의 단풍은 더욱 찬연하게 불타오르는데 캐나디언 메이플이 군데군데 서식하며 산을 더욱 붉게 채색하고 있었고 바람이 소스라치게 불때마다 일렁이는 원색의 물결은 정말 다른 지역의 그것과는 판이하게 다른 장관입니다. The Pine Tree State라는 별칭을 얻고 있는 메인 주답게 푸르름을 간직한 상록수와 황과 홍의 파스텔 물감이 번져있는 활엽수가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니 단풍의 천국 아카디아 공원이 아닐 수 없습니다. 공원을 품고 있는 Mount Desert Island를 들어서며 만나는 어촌, 바 하버는 서서히 몰려오는 어둠속에 하나둘 불을 밝히고 있었습니다.
아름다운 길, 아카디아 트레일
미동부의 최북단에 위치하여 캐나다와 접경을 이루고 있는 메인 주는 미국 북동부의 대서양 연안에 있는 구릉성 산군과 해안 지방에 있는 매사추세츠 주, 코네티컷 주, 로드아일랜드 주, 버몬트 주, 뉴햄프셔 주와 더불어 6개 주로 이루어진 뉴잉글랜드(New England)에 속하는 주로 가장 북쪽에 위치하며 주의 남부와 동부는 모두 대서양과 이어진 천혜의 절경을 품고 있습니다. 1929년 공인된 127 평방킬로미터 면적의 아카디아 국립공원은 바다와 산이 이어진 동부의 유일한 곳으로 대부분의 지층이 화산작용에 의해 생성된 바위로 되어있어 해안선 곳곳에는 바위절벽들이 많아 비경을 선사합니다. 섬 중앙에 우뚝 솟은 최고봉 캐딜락 산을 위시해 고만고만한 산들이 연이어 줄을 서고 크고 작은 호수들은 그 산들을 적시고 바다에는 마치 고래 등같이 솟아오른 섬들이 가득 비좁게 채우고 있습니다.
유일하지만 제법 곱디고운 모래가 가득 모인 백사장이 있어 해수욕도 즐기고 산으로 이어지는 기슭에는 바위가 바람과 파도에 깎여 계란처럼 동글동글해진 자갈밭이 기묘하게 지천으로 널려져 있습니다. 울창한 숲속에서 자연의 정기를 깊숙이 마시며 즐기는 삼림욕도 할 수 있고 공원 내 하이킹 트레일 120마일은 거의 모두가 거미줄처럼 이어져 산행을 즐겁게 해줍니다. 특히 해발 1,530피트의 캐딜락산은 공원 내 17개 산들 중 가장 높은 것으로 원래는 화산작용에 의해 만들어진 산 즉 섬 이었으나 태고의 빙하작용에 의해 마모되고 다듬어져 지금의 계곡이 생겼고 후빙기 때는 빙하의 녹은 물이 골을 채워 만을 만들고 지금의 산 모습을 생성시켰습니다.
캐딜락 산정에서 바라보는 일출의 장관
이른 새벽 삼라만상이 깊이 잠들어 있는 시간, 우리는 산을 오를 채비를 하고 차에 몸을 싣고 어둠을 가르며 해안 길을 달립니다. 캐딜락 정상에서 일출을 보기위한 이른 출정입니다. 아직은 여명조차 없는 칠흑같이 어두운 산길을 머리에 두른 헤드램프의 인색한 불빛만으로 조심스레 산길을 더듬어 올라갑니다. 앞사람의 발자국을 따라 얼마나 올랐을까? 멀리 수평선에 붉은 띠를 두르며 아침은 열리고 주변의 사물들이 인식될 때 둘러보는 좌우는 아카디아만이 보여주는 황홀한 색의 향연이었습니다. 희뿌연 아침 안개사이로 여린 빛이 흩어지는 깊은 숲속. 빼곡하게 채워진 나무들 사이로 황급히 흰 자락을 남기며 안개가 흩어집니다.
정상에 올라 힘차게 차오를 해를 기다립니다. 생색낼 거리 하나 없는 정상이라도 우리 산객들에게는 꽤나 괜찮은 조망터 입니다. 산고의 진통이라도 겪는 듯이 태양은 주변을 핏빛으로 불태우고 어렵사리 수평선을 차오르니 말갛게 펼쳐지는 아카디아의 진면목이 눈 안에 들어옵니다. 아름다운 것들과 인연을 맺고 싶은 것은 인지상정인 것. 특이한 자연물에 이름을 붙여주고 이렇게 다시 찾아와 아는 체들을 하나봅니다. 정상에 서서 좌우로 펼쳐지는 광활한 바다와 산과 섬의 풍광을 보며 아카디아의 비경을 가슴에 각인시킵니다. 돌아다보면 이미 지나온 길도 또 아직 닿지 못한 길도 멀리 떨어져서 바라보면 그 풍경은 언제나 아름답습니다. 산마루 세찬 바람으로부터 전해오는 산의 전설을 마음으로 들으며 또 다른 정상으로 향해 발걸음을 옮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