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북동부 트레킹 후기. 2 위대한 산, 캐터딘 마운틴.

산과 물 그리고 가을. 가을은 어느새 시간을 가로질러 산과 들을 물들이고 봉긋하니 솟아오른 산봉마다 겨울을 품고 너무 서두르지 말라 타이르고 있습니다. 캐나다 일정을 마감하고 우리 산 동무들은 캐터딘 마운틴으로 향합니다. 낯설고 물선 이국땅 이민생활에서 이렇게 산에서 만나 우정을 나누니 나이를 초월하여 벗이 되고 고향처럼 아늑한 쉼터같이 여겨집니다. 우리는 뉘엿뉘엿 기울어가는 석양을 뒤로 두고 노을인지 단풍인지 모를 빛의 굴절과 흡수를 느끼며 함께 물들어갑니다. 캐터딘을 향해 더 깊은 내륙지방으로 들어가면서 등고선은 점점 더 비좁아지고 가을 잎새들은 더욱 낭자한 선혈처럼 현란하게 빛나고 있습니다. 자연은 언제나 일정한 속도로 흘러가는 법, 가을도 언제나처럼 저 멀리 높이 솟은 캐터딘 산군을 넘어와 우리에게 마중을 나와 수인사를 건넵니다. 오늘도 우리 산객들의 마음은 몸보다 앞서 먼저 산을 오르니 삶을 핑계로 놓쳐버리기에는 못내 아쉬운 산의 가을은 너무 아름답고도 짧습니다. 그래서 그 수려한 풍광을 가슴에 담고자 이토록 머나먼 길을 우리는 그렇게 달려왔습니다. 위대하고도 신성한 산은 바로 저만치에 있고 빙하작용으로 기인한 물의 풍성한 생성이 6000여개의 호수들을 만들어 숲의 갈증을 해소시켜 줍니다. 산객들에게는 크나큰 의미를 부여하는 그 성산 아래 한촌의 어느 유곽에 여장을 풀고 모닥불 지펴 T bone 스테이크 구워 몸 보양을 시키고 찬이슬 내리는 시각까지 다음날 조우할 신령한 모습을 상상하며 우리는 조용한 안식의 밤을 맞이합니다.

머나먼 여정, 에팔레치안 트레일
남부 조지아 주 스프링거산에서 발원하여 2181 마일(3510 km)의 대장정을 굽이굽이 돌아와 북부의 마지막 종지부를 찍는 에팔레치안 트레일. 그 정점은 바로 오늘 우리가 오를 캐터딘 마운틴의 정상 Baxter Peak입니다. 가을인데도 빙하의 겨울을 품은 캐터딘 산은 인디언 말로 위대한 산이란 뜻을 지닌 채 성스럽게 버티고 있습니다. 이 산은 메인주의 내륙에 소재한 벡스터 주립공원내에 펼쳐져 있는데 고향을 메인주로 둔 퍼시벨 벡스터란 공원 설립자가 31년간 개인의 노력과 헌신으로 사서 모은 882제곱 평방미터의 광활한 산하를 고향에 기증하여 조성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의 조건은 자연을 훼손시키지 않고 그대로 보존하는 것이어서 당국은 그의 유지를 받들어 공원 내에는 웬만한 편의시설 하나 변변하게 없이 심지어 전기도 끌어들이지 않은 채 순수한 원시 그대로를 즐기게 하였습니다. 모두가 자연 친화적으로 만들어 무스같은 몸집이 비대한 야생동물들도 살아온 고향처럼 아늑하게 여겨지는지 산행길에 가로막고 서서는 스스럼없이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그래서 산행수칙이나 입산허가도 상대적으로 아주 까다롭게 진행되며 반드시 입산 및 하산 보고를 하게 합니다. 메인 주에서는 가장 높은 1606미터(5268피트) 정상을 오르는 산행로도 자연 그대로를 살렸기에 인공시설물이나 철제 보조물은 전혀 없어 많은 낙상의 위험도 도사리고 있습니다. 특히 칼날능선(Knife Edge)으로 유명한 이 Saddle Trail에서 연결되는 Helon Taylor 트레일은 나무와 바위만이 산의 전부이니 가히 자연의 숨결을 고스란히 간직한 산행의 보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신선하게 와 닿는 바람을 동무삼아
Roaring Brook 캠프장에서 출발 시원한 물줄기가 힘차게 흐르는 계곡을 따라 시작되는 Chimney Pond Trail 산행은 아기자기하게 펼쳐지는 연못들을 지나면서 다듬지 않은 길마다 가득 채운 바위들과 대화를 나누며 이어집니다. 신선하게 와 닿는 바람을 동무삼아 걷는 가벼운 오르막길은 몸마저 공중에 부양하듯 가벼운데 어느새 곁에 와있는 가을과 걸음을 맞추게 됩니다. 두 마장을 올라가니 전망대가 마련되어 있습니다. 산군을 배경으로 호수가 펼쳐져 있으니 명경을 자아냅니다. 벌써 등반을 마치고 내려온 가을은 산기슭에 머물고 정상은 어느새 흰색으로 채색되어 있습니다. 흐르는 시간과 돌아가는 계절의 순환에 맞추어 몇 번이나 옷을 갈아입는 산. 이제는 모든 것을 발가벗고 내려놓을 계절이 왔나봅니다. 가을마저 물러서는 문턱에서 마지막 사력을 다해 빛을 발하는 수목들 사이로 바위속살들이 군데군데 드러나 있습니다. 아름다운 명산의 풍모입니다.
다시 주산행로로 들어서니 냉기 품은 가을비가 길을 적시기 시작합니다. 우의로 무장할까 망설이다 참을만하다 생각하고 그냥 그 비를 맞으며 즐기기로 했습니다. 안개가 자욱하게 숲속을 채우니 자연히 시야는 좁아져 발아래 소소한 것들이 쉽게 눈에 찹니다. 길섶에 도열한 가을 들꽃들이 발길에 채이니 산객의 발길은 점점 게을러지고 한번 마음을 주니 여기저기서 봐달라는 들꽃 들풀들이 지천입니다. 깊은 산 외길에서 홀로 맞닥뜨린 새색시처럼 홀로 수줍어하는 쑥부쟁이가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바람에 일렁입니다. 한 송이 꺾어서 동료의 머리에 꽂아도 줘봅니다. 내가 자연이 되고 자연이 우리가 되는 순간들입니다. 소리 없이 계절이 바뀌어 가도 산은 언제나 의젓하게 변치 않고 제 모습을 가꾸고 있어 사소한 변화에도 말 많고 탈 많은 인간사는 이처럼 고요한 자연 앞에 늘 무색할 따름입니다. 드디어 일차정상격인 침니폰드에 이르렀습니다. 골로 모여든 바람은 세차게 불어 호수를 춤추게 하고 병풍처럼 둘러진 흰옷 입은 바위산들이 견고하게 버티어 있으니 세계 10대 명경중의 하나인 캐나다 로키의 루이스 호수를 그대로 옮겨놓은 듯 흡사합니다. 기막힌 풍광에 장탄식을 내뱉으며 한동안 넋을 잃고 바라다봅니다. 시선이 저기 저 육중한 정상에 이르렀을 때 진행해야 할 현실의 여분을 자각하고 다시 길을 나섭니다.

그 무거웠던 삶의 무게를 잠시라도 내려놓고
정상을 향해 Saddle Trail로 들어서는데 레인저들이 황급히 뒤를 따라와서 행선지를 묻습니다. 캐터딘 정상을 향한다니 지금은 악천후라 불가능하다며 안전한 Blueberry Knoll을 권합니다. 눈앞에 펼쳐져 보이는 정상을 아쉬운 마음으로 다시 한번 쳐다보고 발길을 돌려 이웃한 또 다른 정상으로 향합니다. 다가오는 계절을 고요히 받아들이는 산. 그래서 산에는 여러 계절이 공존하고 있습니다. 거대바위들이 그대로 산행로를 메운 길을 피하듯이 돌아가기도 하고 징검다리 삼아 뛰어넘기도 하며 허리춤에 까지 낮아진 수목한계선에 이르니 드디어 바위산이 앞을 막습니다. 온몸으로 올라야 하는 바위산, 평지의 그것과는 유별난 즐거움을 줍니다. 건강한 땀은 비오듯이 쏟아지니 참으로 개운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비에 젖은 몸에 열기가 뿜어 나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더니 안개비에 다시 뒤섞여버립니다. 이제는 산마루를 잇는 능선 산행이 시작되고 비록 온몸으로 바람과 싸우며 걷는 길이지만 그 즐거움은 탁 트인 전망을 마음껏 볼 수 있음입니다. 파인트리 주답게 침엽수들이 가득 산하를 메우고 군데군데 호수들이 조화를 이루어 아물거리니 산 아래 풍광은 무릉도원이 따로 없습니다. 산불이 지나간 아련한 흔적들이 곳곳에 남아있는 돌밭에는 깃발처럼 펼쳐진 고사목들이 해를 향해 뻗어가고 스스로 생성되고 소멸되는 순환을 통해 나름의 생존과 번영을 꾀하고 있습니다. 그런 고통과 인내 속에서 변함없이 버티고 있는 산처럼 자연의 소중함을 온몸으로 느끼는 순간입니다. 이 황량한 바위 산마루에서 오직 걷고 있는 것은 나 자신과 바람. 드디어 우리는 정상에 서고 바람을 버티며 주시하는 서로는 아무 말이 없습니다. 어쩌면 아무 말이 필요 없는 순간인지도 모릅니다. 서로를 향한 침묵의 주시만이 산행의 이유가 되는 순간. 옅은 미소라도 나누면 하늘이 더욱 밝아지는 듯합니다. 비록 전 구간을 종주하지는 못했어도 유서깊은 에팔레치안 트레일의 마지막 아름다운 길을 함께 걸었으니 지나온 세월보다 더 깊고 돈독한 우정의 시간을 만들었다 자부합니다. 이처럼 그 무거웠던 삶의 무게를 잠시라도 잊고 성산의 고봉에 서서 세상을 향하니 산 아래 두고 온 시간들이 그리고 내 마음이 마냥 지금 내리는 이 가을 세우처럼 가볍게 여겨집니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