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값으로 바라본 세상

새크라멘토 인근 출근 길에 우연히 자동차 사고를 목격한 데릭 드안다. 누구라도 그랬겠지만 그는 911을 불렀고 응급차가 도착하기전 우선은 급한대로 차에 갇혀있는 부상자를 도왔다. 응급차가 도착하자 상황을 구급대원에게 넘기고 의례적인 서류에 몇가지를 기입한 후 사고 수습을 돕느라 긴장된 마음도 가라앉히고 더러워진 손을 닦기위해 물 한병을 얻어 사용했다. 그리고 나름 뿌듯한 마음으로 사고현장을 떠났다.
그런데 황당함은 그로부터 한 달쯤 후에 벌어졌다. 911을 관장하는 의료행정 당국으로부터 난데없는 $143의 의료청구서를 받아들게 되었다. 사정을 알고보니 그날 현장에서 얻어쓴 병물 한개에 대한 청구서였다. 선량한 시민으로서의 감사는 커녕, 뜻하지 아니한 청구서까지 받아든 ‘우리의 수호천사’ 데릭은 씁쓸한 대로 지인들에게 마음을 토로하였고, 그 지인들은 복장 터지는 사연을 인터넷에 올림으로 내용 전모가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세상은 일제히 이 부당하면서도 기묘한 뒤바뀜의 전도를 지적하고 어처구니 없는 의료시스템의 맹한 관성을 질타하면서 <선한 사마리아인>에게는 심심한 위로와 격려를 잊지 않았다. 게다가 그 즈음의 빠른 전파력도 한 몫을 하여 마침내 새크라멘토의 긴급 의료당국은 그 청구가 절차상 온당했지만, 예외적으로 철회하겠다고 발표함으로 어정쩡하게나마 모든게 마무리 되는 듯 했다.
그런데 의료계는 이를 어떻게 보는지 모르지만 왠지 이번 사태가 보여주는 상징적 의미를 곱씹어 봐야할 것 같았다. 왜 병물 한병값도 도대체 그 의료쪽으로만 가면 그렇게 비싸지는지를, 도매로는 코스코 같은 곳에서 같은 용량의 병물 하나가 채 11센트가 넘지 않고, 소매로 치면 세븐 일레븐 같은 곳에서도 냉장고에서 갓 꺼낸 놈이 고작 $1.25 이쪽저쪽 일진데 어떻게 그쪽 구석에만 가면 천하가 아는 물값조차 $143로 둔갑을 하는지….

 

 

그저 아연할 뿐이다. 더 끔찍한 것은 하물며 우리에게 익숙한 물값이 그럴진데 의료분야의 특성상 우리가 생소하거나 도통 알리 없는 각종 약품과 여러 의료행위에 걸맞는 화폐적 환산은 과연 그들이 청구하는대로 언제나 떳떳하고 온당한 것인지 나는 소심하므로 의심해 보았다.
분질러 말하면 이렇다. 이 문명사회에서 우리 모두 죽는 날까지 의료 신세를 지어야할 의료 소비자로서 할 말은 해야할 것 같다. 사람 사는데 우선은 먹고 입고 거처하는 흔히 의식주로 개괄되어 있고, 그 의식주를 영위하는 사람의 건강과 안위를 관장하는 철학과 종교와 의료가 또 다른 분야를 이루며 구조되어 있지만 유독 어느 한쪽이 현저하게 기울어져 마치 횡포와 다름 없는 패악을 부려 우리가 동이 트면 일을 나가고 해가 지면 귀가하는 그 고단한 노동의 댓가로 벌여들인 평생의 작은 축적마저도 어느 한쪽에 그것도 일시에 쏟아부어 탕진해야만 한다면, 그런 구조가 우리로부터 과연 얼마만큼 지지받으며 그리고 그 유지가 얼마나 지속될 수 있을까 머리를 긁으며 생각해 보았다.

 

 

더욱이 끔찍한 것은 우리가 심신이 온전치 못할 때 특히 사람의 생명과 연관지어, 저항할 수도 거부할 수도 없는 상태에서 어느 병상 한 구석에 몰려 목숨과 벌이는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는 자에게 부과되는 의료비의 부당성과 과다성은 도대체 언제까지 사회구조가 끼고만 돌아 눈감아져야 하는 것인지, 물론 보험을 말하기도 하고 그 분야에 종사하는 직업을 갖게될 때까지의 고단함과 보상에 대해서도 어느정도 인정하는 바 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 쏠림의 정도가 심하여 어울려 사는 세상 참으로 음험하고 의욕있게 살려는 사람 기분 잡치게 하기에는 실로 넉넉한 불공평이다.
혹자는 또 말하기를 오바마 캐어가 있어 사정이 완화되지 않았냐고 물을 수도 있다. 헌데 조금만 기울여 바라보면 그것은 의료비가 낮아진 것이 아니라, 그 의료비를 그대로 놔둔채 개인으로서는 턱없이 모자라는 부분을 정부가 기약없이 보조해주는 상황이니 문제의 본질을 해결한 셈은 아닐 것이다.

 

 

의료 기술상 치료가 가능한데 거기에 드는 경비가 문제가 되어 사람이 삶을 포기해야 하는 경우가 있다면 그것은 인류사에 엄연한 후퇴와 죄지음일 것이다. 더불어 사는 세상, 내키지 않지만 좀더 가혹한 말을 돌려 말한다면 이렇다. 집단 이기가 팽배하여 어느 한쪽의 이익만 불거져있는 불균형이라면 그것이 배분이 되었든 생산이 되었든 아니면 냉정한 먹이사슬의 삼각형이건 결코 건강한 사회는 아닐 것이다.
결국은 지난 역사가 그러하였듯 잘 맞아 떨어진 소수가 어두운 방에서 돈을 헤아리고 이웃의 양을 앗아 자기의 울 안에 채우는 동안 인류사가 단절이나 파괴로 방향을 잡지 않으리라 누가 과연 장담하겠는가 행여 우리가 몸담고 있는 분야가 사회의 다른 분야를 타누르고 나머지의 눈흘김 속에 홀로 우뚝해지는 것은 아닌지 그리하여 내가 나누는 과실이 혹 경쟁이라는 이름 아래, 동료의 시체 위에서 치루어진 소수만의 향연같은 것은 아니었는지 되돌아봄도 오늘과 같은 문명사회를 사는 사람으로서의 책무일 수 있다.
회자되는 최소 급여 $15도 상위 10%와 하위 90%의 양극화와 그들의 넘치는 구호들도 사실은 모두 같은 본질위에 바탕하고 있다. 세계와 인간, 거기 행여 굶어 죽어가는 영혼과 생명이 있다면 그것이 혹, 왜곡된 분배 때문이 아니었는지를 우린 눈을 부릅뜨고 살펴봐야 하듯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