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푸는 열쇠

요즘 우중충한 마음에 시달려서 딸이 고양이라도 키우라고 지속적 협박, 조언을 했다. 오래전 부터 알고 지내던 지인에게 지나가는 말로 “딸이 자꾸 고양이라도 키우라고 하네요” 그랬더니 그 지인이 나에게 “고양이는 의외로 마음을 달래줄 수 있는 반려동물이에요. 저도 유학생 시절에 너무 외로워서 고양이 알레지 약 먹으면서까지, 고양이를 키웠어요. 훨씬 마음이 나아지더라구요.” 그때 나는 처음으로 지인의 얼굴이 보였다. 나도 너무나 외로운 유학생활을 했기에, 그 아픔, 고독함, 씁쓸함을 기억하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많은 사람들과 만나고, 생활을 공유하고, 얽혀서 살지만, 사실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그냥 하나의 이미지로 우리에게 다가오고, 스쳐가는 것 뿐이다. 20년전의 자주 어울리던 직장동료의 이름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 동료의 이미지만 남아 있는 것이다. 이것이 특히 심한 나는 가끔 마트에서 눈인사하는 사람에게 맞인사는 하지만, 그 사람이 동료였는제, 거래처였는지, 손님이었는지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가끔은 반가운 손님에게 인사를 했더니, 사람 잘못 보았다고 어색한 경우도 종종 있다. 그런데 이 지인의 얼굴은 이제 어디서든지 알아볼 것 같다.

인종차별, 이민자 차별, 성차별이 휭휭하는 요즘이다. 이 차별의 마음이 보수, 진보, 기독교, 이슬람을 망라하고 존재한다. 백인친구는 나에게 이민법의 강력규제와 엄격함을 주장하고 있었다. 이 친구에게 불법 이민자는 히스패닉과 동일한 이미지 였다. 즉, 모든 히스패닉은 불법이민자 또는 그 친척일거라는 신념이 있었다. 이 백인친구는 이런 이유로 어떤 히스패닉을 만나던 부정적 시각으로 문제점을 찾으려하고, ‘혹시라도’가 아니라 ‘역시나’로 결론을 맺고 있었다.

이 백인친구의 어두운 마음을 열 수 있는 열쇠는 하나 뿐이다. Empathy, 딱히 한글로 번역이 안되는 이 단어의 뜻은 ‘감정이입, 상대측 시각의 공감, 동질감’ 이라 하겠다. 내가 상대의 입장에서 세상을 바라볼수 있다면, 그것은 새로운 세상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백인친구는 히스패닉 친구가 없다. 단 한번도 히스패닉의 시선으로 세상을 볼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백인우호자, 나찌, KKK 단원들은 단연코 아는 흑인, 유태인 친구가 없다. 동성애 혐오자들은 아는 동성애 친구가 없다. 동양인 비하 백인들은 아는 동양인 친구가 없다. 반이민법자들은 아는 이민자 친구가 없다. 그래서 그 시각의 차이는 좁혀지지 않는 것이다. 최근에 발표된 몇몇 실화에 바탕을 둔 영화들이 그 좋은 예를 보여준다. KKK 지부장이 우연히 친분을 쌓은 흑인친구로 인해서 결국 그 KKK 라는 흑인혐오 집단을 탈퇴하고 흑인친구와 맥주를 같이 마시는 생활을 즐긴다는… 십여년전에 버지니아 시골로 이주한 중국가족에게 매일 인종차별 편지를 보냈던 KKK 단원에게, 매일 답장을 보냈던 중국가족 막내딸의 이야기. 결국 그 중국가족이 그 커뮤니티에서 환영받는 일원이 되기까지는 서로에 대한 이해가 필요한 것이었다.

나를 이해해주길 바란다면, 나를 알게 해줘야 할 것이다. 또한 저쪽의 시각을 통해서 나를 바라보면, 상대도 이해가 쉬울 수 있다. 부동산에서도 셀러와 바이어가 종종 추상적 ‘돈’이라는 문제로 대립된다. 셀러는 바이어가 무조건 자신의 ‘돈’을 노린다고 믿고, 바이어는 셀러가 터무니없이 자신의 ‘돈’을 강탈한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때로는 상대의 시선에서 볼 필요가 요구된다.
왜냐하면, Empathy만이 유일하게 마음의 문을 여는 열쇠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