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라랜드

딸과 함께 영화 <라라랜드>를 본적이 있다. 매스컴에서 워낙 요란스럽게 오르내리던 것이라 공연히 실쭉한 눈이 되어 벼르는 마음으로 영화를 봤는데 내용은 대략 이랬다. 제목에서 암시하듯 LA라는 대도시에서 배우가 되려는 여주인공 미아와, 순수 재즈의 열정을 품고 살아가는 재즈 피아니스트인 셉, 그들은 각자 꿈을 쫓는 젊은 dreamer이지만 현실에서는 번번히 오디션에 떨어지는 배우지망생이며 한낱 커피샵의 알바생이 되어 오늘을 산다. 셉 역시 식당에서 손님들을 상대로 ‘징글벨이’나 치는 무력한 피아니스트일 뿐 자기 색깔의 재즈를 마음껏 연주할 공간은 아직 없다.

 

 

어느 해거름이 내리는 저녁, 레스토랑에서 자신의 감흥에 취한 셉은 재즈음악을 홀리듯 연주하게 되고 그 음악에 이끌리어 들어선 배우지망생 미아, 드디어 서로의 운명과 마주하게 되지만 업소에서 허락되지 않는 재즈연주를 했다는 이유로 현장에서 해고를 당하게 된다. 우여곡절 끝에 운명처럼 사랑을 키워가게 되는 미아와 셉, LA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공원에서 뮤지컬 특유의 노래와 춤이 벌어지고 ‘숲속의 왕자”나 ‘백마탄 기사’에서처럼 여자라면 한번쯤 품게되는 소공녀 감성을 영화는 한껏 고조시킨다. 특히 공원 천문대 장면에서는 더욱 심하여 별이 흩뿌리는 밤하늘을 배경으로 셉이 미아를 마주하여 춤을 추다 미아의 허리를 띄워 밀면 미끄러지듯 그대로 허공으로 솟아올라 빚어지는 덩실한 춤판은 압권으로 기억에 남는다.

 

 

여자관객이라면 누구라도 이 환상의 장면을 잊을 수 없을 것이나 불행하게도 나는 그 때 딸과 함께 여서 그 오글거림에 대해 솔직할 수 없었다. 왠지 보름달을 배경으로 자전거가 날아 오르는 영화 E.T가 연상되면서 딸과 나는 겸연쩍음을 줄이려 고작 서로를 쳐다보며 민망한 웃음을 보였을 뿐이었다. 옮기는 춤동작마다 쏟아지는 별이며 늘어진 채 깃을 친 치마와 가녀린 허리를 부여잡고 원무를 도는 셉의 능수능란한 춤의 실루엣, 여심의 B급 감성과 허영을 채워주기에는 차고도 넘쳤다.
하지만 꿈처럼 이어진 사랑은 오래지 않아 파국을 맞게 되고 서로의 성취를 위해 헤어진 사랑 역시 그 성취를 이루고 나서도 다시 맺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세월은 흘러 셉은 세상의 홀대를 딛고 자신의 이름을 건 순수 재즈클럽을 갖게되고, 미아는 마침내 가난과 무명을 털고 스타가 되어 예쁜 가정도 갖게 된다.

 

 

그러다 이야기는 필연적인 결말로 치달으며 운명은 한번 더 그들의 만남을 준비하고 있었다. 미아는 남편과 함께 아주 우연하게 셉의 재즈클럽에 들어가게되고 남편을 옆에 두고 마주한 옛사랑의 추억, 셉도 그녀를 알아보고 그들만의 추억이 담긴 재즈곡을 처연하게 연주하는 동안 미아는 그들 운명의 갈림길이 되었던 순간들을 다시한번 곱씹게 된다. 그때 그들의 나눔이 어색한 헤어짐이 아니라 입맞춤이었다면 그리고 리앨토극장에서의 극적 재회와 꿈을 접고 낙향하던 순간의 결정들, 달라진 음악 환경속에 살아남기 위한 셉의 음악적 타협을 그토록 몰아 닦아세우지 않았더라면… 그러면서 자동차 크락션 소리로 구분되어지는 달라진 선택의 연속이 화면속에 난무한다. 그리고 그녀의 상상속에서 펼쳐지는 장면들은 그지없이 계속되어 이번엔 놀랍게도 미아가 셉의 아기를 임신하고 행복한 가정을 일구어 함께 살아가는 모습이 끝없이 펼쳐진다. 그러나 현실의 미아옆에는 속모르는 실제의 남편이 여전히 과묵하게 앉아있을뿐 절제된 아쉬움과 회한은 금세라도 켜켜히 가슴에 내려앉으며 여린 피아노곡과 더불어 영화는 끝이나고만다.

 

 

영화 곳곳에서 어디서 본듯한 장면들이 짜깁기 되어 있었으나 그것이 식상이 아니라 복고와 조명속에 다시 살아난 일종의 빈티지 효과를 내고 있어 비교적 따뜻한 영화였다고 생각한다. 영화를 만든 감독이 겨우 갓서른을 넘겼다는 것이 조금 못미더운대로 주제 역시 꿈과 사랑을 노래하고 잊혀진 사랑과 못내 잊혀지지 않는 사랑을 담아 아련하기까지 하다. B급 감성을 자극한다하는 것도 어차피 삶 자체가 이류의 속성을 갖고 있으니 나는 그걸 용인하기로 했다.
누구나 사랑과 꿈을 뒤바라지하며 살아왔을 삶의 구비가 있고, 경우에 따라 큰 괴로움이나 죄책감없이도 한단계씩 전락처럼 치뤄온 남루한 매듭이 아무에게나 있을 수 있다. 그리하여 한줌의 자부와 또 한움큼의 부끄러움속에 기억할 이 한살이(生)의 몫, 대개 당시로는 최선이라 선택했던 길에 대한 깊은 회한과 이런저런 이유로 포기하여 가보지 못한 길에 대한 눈물어린 동경심으로 나이가 들어도 겪게되는 불면의 밤이 있을 수도 있으리라.

 

 

그러나 어찌하랴! 못 마땅한대로 그것도 내 삶이었음을… 지나간 것은 지난 간대로 받아들이고 간직하는 것도 순리라고 나는 믿고 있다. 왜냐하면 자신과의 끝없는 타협의 연속이 그리고 그 퇴적과 망각마저도 삶의 한 속성임을 믿기에, 따라서 아니 어쩌면 처음부터 우리들의 라라랜드는 꿈의 정형이 아니라 이미 변하기로 되어 있는 가변과 역동의 개별적 항해임을, 또 그것이 우리들의 출생과 더불어 받아놓은 어떤 신성한 전제는 아닐까 하는 느낌을 왠지 버릴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