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김남길은 영화 ‘어느날’의 시나리오를 보고 깜짝 놀랐다.
이윤기 감독에게 한 첫 말이 “이거 정말 감독님이 하시려고요?”라는 반문이었다. 이 감독의 전작들과 전혀 다른 스타일에 반신반의했으나 결론적으로 “무겁고 진지할 수 있는 이야기가 수위 조절이 잘 됐다”고 즐거워했다. 또 “이윤기 감독님이 추구하는 본질에서 벗어나지도 않았다”고 만족스러워했다.
수위 조절을 위해 감독의 고민이 가장 컸겠지만 김남길도 동참했다. 일단 멜로나 로맨스처럼 보이지 않으려 했다. 배우 천우희와 둘이 함께하는 장면들이 꽤 많은데, 혹시나 멜로로 보이지 않을까 노심초사했다.
김남길은 “천우희씨와 시장을 가거나 어디를 갈 때 데이트하는 모습처럼 보일 때는 ‘다시 찍자’, ‘무덤덤하게 하자’는 생각을 많이 했다”고 회상했다. “사실 멜로나 로맨스물을 찍을 때는 서로에 대해 더 알아야 하는데 이번에는 어떤 경계를 두고 연기하려고 했던 것 같아요.”
사실 내부적으로 두 사람의 멜로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의견이 나오기도 했다. 상처받은 사람들이 서로를 위로 하다 애정이 생기기도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와이프를 잃은 아픔에 대한 치유가 꼭 연인으로 발전해야 할 필요는 없었기에 로맨스 감정은 배제됐다.
김남길의 고민은 또 있었다. 천우희가 영혼으로 나오는 신을 어떻게 소화해야 하는지에 대한 것이었다. “미소는 나에게만 보이는 존재이니 억지스럽지 않게 보이길 원했어요. 나에게는 보이고 윤제문 형님에게는 안 보여야 하니 ‘내 시선 처리가 맞나?’라는 고민부터 정말 다양했죠. 윤제문 형님과 같이하는 신은 소소한 재미가 있었으면 했는데 과하지 않게 보여준 것 같아 좋아요.(웃음)”
김남길의 고민은 계속됐다. 미소가 영혼이라는 존재를 깨닫고 혼비백산 도망치는 장면에서 깔창이 튀어나오는 게 맞는지에 대한 의문이었다. 그는 “‘아내가 죽었는데 구두에 깔창을 끼우고 다니는 남편이 있나?’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는데 그건 별로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지점이더라”며 “아픔은 있지만 남겨진 사람이 먹고살아야 하는 건 또 다른 지점이지 않은가. 삶 자체는 그 상실 속에서도 계속 이어지는 것”이라고 짚었다. 그만큼 김남길이 설정 하나하나 세세하게 고민했다는 의미라고 할 수 있다.
“연기와 관련해 어느 누가 봐도 ‘배우가 진짜 힘들었겠다’, ‘엄청난 몰입감으로 연기했겠다’라는 생각을 할 수 있는 연기를 하길 바라요. 유작이라는 말을 써도 될진 모르겠지만 죽음도 불사하지 않는 무언가라고 해야 할까요? ‘이 작품을 남기고 죽어도 되겠구나’라는 어떤 연기에 대한 로망이 있어요. 그런 작품을 만날지는 모르겠으나 배우로서 가진 바람이라고 할 수 있죠.(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