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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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을 재촉하듯 비가 내린다. 어느덧 지겹던 무더위가 끝났는데 찬바람이 살갗을 파고드니 ‘춥다.’는 생각을 한다. 빨리 가을이 오기를 기다리던 무더위의 지침으로 몸이 흥건하게 젖었던 그 며칠을 이미 잊은 것 같다. ‘미국 대선!’ 많은 사람의 최대 관심사였던 대선 토론회, 특히 불법으로 있는 이민자들에게 작은 희망의 불꽃이 일어날 수 있을 거라는 커다란 꿈을 갖고 지켜보았던 둘 만의 열전, 누가 그들에게 희망을 주었으며, 누가 그들에게 꿈을 주었을까? 이제 막 시작은 되었지만, 그들이 바라는 희망은 과연 무엇일까, 각자의 생각이 모두 다르겠지만, 우선 경제적인 여유가 찾아와 우리 국민이 일할 기회, 불법체류자들이 한숨 돌리며 기쁨의 미소를 지으며 생기를 찾을 수 있는 그 날, 그렇다, 미소한 우리 소시민이 원하는 것은 오직 그 작디작은 소박한 꿈이건만, 많은 사람이 묻는다. “누가 대통령이 될 것 같아요?”라고, 대답하기 곤란하다. “미안해요. 저는 선거관리 위원이라서.”라고 입을 다물었을 때, “그래도, 누구를 찍을 것을 이미 결정하시지 않으셨나요?”라고 묻는다. “이번에 OOO가 대통령이 되어야 우리 같은 불법 체류자가 풀려날 수 있을 텐데.”라고 중얼거리는 그의 마음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한 치 앞을 바라볼 수 없는 것이 우리의 앞날이 아니던가. 그래, ‘불법’이라는 말 자체가 없어져야 하겠지, 일자리도 많이 생겨야 하겠지, 그리고 그동안 만나지 못했던 그리운 조국 땅에 있는 가족과의 상봉도 이루어져야 하겠지, 그래서 너도나도 서로서로 힘찬 발걸음을 내딛는 가난하고 힘없는 그들의 눈에서 초롱초롱한 광채가 날 수도 있으련만, “일만 할 수 있다면, 병원 보험만이라도 받을 수만 있다면, 영주권 없어도 괜찮아요.”라고 말하지만, 원래 사람의 욕심이라는 것이 거기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저 눈치 보지 않고 쫓겨 다니지 않고, 당당하게 가슴을 쫙 펴고 힘찬 발걸음을 내디딜 수 있는 작은 여유만 있어도 행복할 것이다.

“어쩌다 불법이 되었어요?”라고 물을 때마다 그들의 대답은 항상 한결같다. “변호사를 잘못 만나서 그렇게 되었어요.”라고. 어려움에 부닥쳐 있는 사람을 변호해야 할 변호사 때문에 오히려 인생의 막다른 골목으로 처박아 버린 변호사, ’이민변호사’들은 자신들이 아주 굉장한 법조인인 줄 착각하고 있는 것 같다. 왜 그랬을까? 이제 막 이민 온 이민자들을 위해 영주권 신청을 해 주어야 할 변호사가 왜 그들을 빠져나올 수 없는 깊은 구렁텅이로 몰아넣었을까? 그리고 그들은 무엇을 변호했는가? 하긴 그들의 사연이 너무 길어 다 들어줄 수는 없었지만, 그들의 말을 듣다 보면 답답한 마음을 어찌해 볼 도리가 없다. 그리고 그 잘난 변호사 때문에 그들은 깊은 한을 가슴에 담고 하루를 산다. “이번엔 우리 같은 불법체류자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는 그런 대통령이 나왔으면 정말 좋겠어요. 그래야 우리도 희망을 걸 수 있지 않겠어요?”라고 말하는 그의 눈엔 어느덧 자신이 그 깊고 깊은 구렁텅이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영광의 날이 그의 앞에 우뚝 서 있는 것처럼 가슴을 편다. “아무튼, 요즘은 열심히 기도하고 있어요.”라는 그에게 “그러세요. 잠시 기다리시면 좋은 소식이 있겠지요.”라고 말하지만, 내가 뭐 앞날을 바라볼 수 있는 용한 재주가 있는 것도 아니련만, 내가 그들에게 해 줄 수 있는 말은 오직 그것뿐이었다.

이 세상에 기도하면 다 이루어진다고 말하는 사람들, 그러나 기도해서 다 이루어질 수 있다면, 뭐하러 머리가 빠지게 공부하고, 힘들게 일하겠는가? 하늘도 구제할 수 없는 방법이 없기에 우리의 기도가 다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 세상엔 할 수 있는 일거리도 아주 많건만, 있어도 할 수 없어 돈을 벌 수도 없고, 병원이 아무리 많은들 그들에겐 개밥에 도토리일 수밖에 없는 현실에 그들은 그저 몸만 부르르 떨 뿐이다. 흔해 빠진 별것도 아닌 쌀 한 포를 소중하게 가슴에 안고 떠나는 사람들, “앞으로 몇 달은 걱정이 없네요.”라고 말하는 그들은 웃고 있었지만, 그들의 눈이 기뻐서 흘리는 웃음이 아닌 슬픈 인생을 다독이는 아픔으로 내 가슴을 에운다. “그래, 우리에겐 별것이 아닐지언정, 그들에겐 한숨을 돌릴 수 있다니 다행이지 않은가.”라는 생각을 하지만, 오히려 기쁨보다 더 깊고 애절한 슬픈 마음이 되어 그것을 건네주는 내 손이 부끄럽기만 하다. 그러나 언젠가는 그들에게도 미쳐 날뛰도록 기쁠 수 있는 그런 날이 반드시 찾아오리라. 그리고 이렇게 말하리라. “너무 행복해요. 이젠 아무 걱정 없어요.”라며 정말 기쁜 마음이 되어 창자를 쥐어짜며 웃을 수 있는 그 날이 반드시 그들에게 찾아오리라. 아! 그 웃음만 보아도 나는 더 바랄 수 있는 행복이 없으련만, 그날이 언제나 올는지, 아마 몇 달 후에 올 수도 있을 것이니 여러분 희망을 품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