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업군이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는 직종에 있다보면, 직면한 문제를 대하는 고객들의 태도와 감정 표현도 그만큼 다양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얼마 전 컬럼을 쓰는 친구의 감정 조절과 마음치료에 관한 글을 읽다보니 ‘자기감정을 바로 알고 말로 표현하는 것’이 힐링의 시작이라는 문구가 와닿았다. 뭉뚱그려진 감정을 제대로 표현해보지 않은 이는 수많은 감정을 제대로 표현하고 인정하고 원활하게 다루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냉장고에 맛있는 산해진미를 꽉 채워놓고 뭔지 몰라서 익숙한 콩나물이랑 김치만 꺼내 먹는 형국’이라는 설명이었다. 사무실을 들고나는 사람들의 다양한 감정군에 휩싸여 있다 보면 내 감정도 뒤죽박죽일 때가 있다. 나와 내 고객이 케이스를 진행하면서 느끼는 감정의 카테고리를 세분화해서 예측할 수 있으면 어떨까 생각해 봤다.
고객들의 감정을 풀어보면 대충 이럴 것이다. 어느날 IRS 직원이 집에 불쑥 찾아와 명함과 서류를 건넨다. 우체국에서 심상치 않게 두툼한 IRS 통지서를 찾아왔을 수도 있다. 손에 땀이 나고 심장이 뛰기 시작한다. 혼자 해결해보려고 초초하게 한 시간 가량 전화 연결을 기다렸지만, 자초지종 설명에는 관심없는 IRS 직원이 범죄인 취조하듯이 대하자 주눅이 든다. 수년간 밀린 세금보고서를 준비해서 다음 주까지 내라는 마감일을 받고는 대화가 잘못 진행되는 듯한 암담한 느낌에 중간에 끊어버렸다. 새벽까지 뜬 눈으로 인터넷을 검색한 후 오전에 날이 밝자마자 몇 군데 상담 약속을 잡고 나니 일말의 안도감은 생겼으나, 처음 찾아가는 회계사-변호사 사무실로 가며 잘한 결정일까 헷갈려 더욱 긴장감을 느낀다. 친절하지만 단호하고 점잖게 하나하나 짚어주는 전문가와 상담을 하고 나니, 막연하게 느끼던 두려움 (집, 자동차, 은행, 직장으로의 차압 가능성, Lien 파일은 언제 왜 되는지, 형사 처벌 가능성, 밀린 세금보고서, 마감일 조정, 청원 절차, 정부 양식 (Form) 완성과 증빙서류 제출로 IRS와 협상 등)의 구름이 걷히면서, 내 편에서 사정을 이해해주는 사람과 있으니 어깨의 부담이 가벼워짐을 느낀다. 억울함, 과정을 몰라서 생긴 답답함, 해결을 미루어왔던 핑계거리들, 숨겨야 할 것 같은 속내도 털어놓고 나니 차라리 시원한 심정이다.
상담 후에 집으로 오니 사무실로 준비해서 보내야 할 숙제 서류가 산더미이다. 서류 재촉을 몇 번 무시하고 나서야 주말에 맘먹고 시간을 내어 앉았다. 은행 잔고내역을 출력하고 서류뭉치더미에서 유틸리티 청구서까지 월별로 모아 스캔을 뜬다. 한 두시간이면 끝날 줄 알았는데 점심을 먹고 다시 앉아서도 끝나지 않는 서류 정리. 와이프가 집 정리한다고 버린 박스 안에 내가 필요한 서류가 있었음을 기억하고 다시 요청해서 받아야 할 것을 생각하자 분노와 짜증이 밀려온다. 이것말고도 할 일이 태산인데. 그러나 서류를 보내줘야 전문가들이 정리, 요약, 분석해서 협상을 할 수 있기에 다시 맘을 다잡고 마무리 작업을 한다. 이윽고 시간이 흘러 전문가가 전체 넘버를 죄다 뽑아 분석한 팩트와 내 사정에 맞춘 협상서류를 마주하니 왠지모를 정화감이 든다. 그래, 태산같던 문제도 겨우 이거였어. 정부와 협상에 들어가고, 나는 초조하게 결과를 기다린다. 까다로운 추가 서류 요청이 있었지만 차분히 그것까지 보낸다. 꼼꼼하게 내 편에서 정부와 협상하면서도 내가 포기해야 할 점과 지금 챙겨야 할 점을 알려주는 전문가 덕에 차라리 느긋한 마음이다. 여기까지 온 보람과 미루던 문제를 정면으로 해결하고 있는 나에게 존중감도 생긴다.
드디어 IRS와의 협상이 종결되고 내 주머니 사정에 맞는 해결방안으로 방향이 잡힌다. 앞으로 내야 할 돈은 있지만 더이상 통지서와 차압에 시달리지 않아도 되니 해방감이 든다. 두렵고 어려운 난제를 여러 고비를 지나 넘겼다는 성취감으로 자신에게 작은 선물을 한다. 다시는 이런 일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전문가와 같이 계획을 짜고 행동으로 옮기기로 한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마지막 미팅을 하고 나가면서 보니, 첫 상담을 기다리며 근심어린 표정으로 앉아있는 사람이 있다. 씩 웃어주며 “머지않아 웃을 날도 찾아올 겁니다. 화이팅하세요!”하며 문을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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