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많은 세월

사람들은 항상 ‘한 많은 세월’ 또는 ‘한스러운 세상’을 살았다고 말한다. 인간이 아무리 오래 살아도 120살을 살 수 없는 세상살이, 그 많은 세월을 살았으면서도 그들은 왜 항상 ‘한 많은 세월’을 살았을까? 어떻게 살아야 또 어떻게 살아가야만 한없이 좋은 세월을 살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너나 나나 돌아보면 지나온 세월은 늘 후회가 많은 세상살이가 아니었든가. 그들의 사연을 듣다 보면 상처는 누구에게 받은 것이 아니라 바로 나의 배우자 또는 가족에게 받은 상처가 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내가 혹은 남편과 함께한 세월은 기쁨과 행복의 세월이 아니라 가슴에 커다란 상처를 주고 아픔을 겪게 한 것을 생각하면 정말 알게 모르게 ‘한 많은 세월’을 살았을 것이다. “저는 늘 화병을 앓고 살아요. 젊어서 남편이 바람을 피운 것이 이렇게 나이가 들어도 도저히 용서가 안 돼요.”라고 말하던 노인은 정말 어느 날 남편에게 이혼장을 내밀었다. 그리고 80이 넘은 남편은 옷 가방 챙겨 들고 한국으로 가버렸다. 이제 젊었을 때 바람피운 남편과 떨어져 사는 노인은 행복할까?

그러나 노인의 얼굴엔 항상 어두운 그림자가 짙게 배어있었다. “그래도 옆에 없으니 살 것 같아요.”라고 미소를 보이지만, 그 미소 속엔 수심이 잠겨 있었다. 어느 남자는 젊어서 아내와 이혼한 후, 한 번도 여자를 가까이하지 않아 쓸모없이 늙어버린 자신의 세월이 ‘한스럽다.’ 라고 하였다. 이젠 나이가 너무 많아 양귀비 같은 여자들 트럭으로 실어다 줘도 바라보기도 힘든 늙음, 어쩌랴! 한스러운 세월을 보낸 안타까움도 있겠지만, 어찌해 볼 도리도 없는 늙은 몸이 그저 한스럽기만 하다.
정성과 사랑으로 키운 자식들, 이젠 부모를 섬기지 않는다고 ‘자식 키워 봐야 다 소용없어요.’라고 말하는 사람은 자신도 그 나이에는 그렇게 부모를 잘 섬기며 살지 않았을 것이다. 자신은 그렇게 못했지만, 자신이 낳은 자식은 당연하게 자신을 잘 모셔주기를 바라는 것, 그것은 바로 욕심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말한다. 착한 아들, 말 잘 듣는 아들, 부모만 알던 아들이 결혼한 후 이젠 부모 말도 듣지 않으니 며느리 잘못이라고 한다. 그리고 딸도 엄마 아빠만 알았는데 결혼한 후 잘 찾아오지 않는다며 “사위가 좀 못 된 것 같아요.”라고 하였다. 그들의 말을 들으며 “며느리를 딸로, 사위를 아들로 생각하면 이해가 갈 수 있지 않을까요?”라고 했더니 “우리는 자식들 그렇게 안 키웠어요. 얼마나 착한데요.”라며 기겁을 한다. 내가 뭐 자기 자식 잘못했다고 말하는 것도 아닌데 그들은 어찌 되었든 자신의 것은 모든 게 완벽하고 버릴 것이 없었지만, 남의 것은 모두 다 쓸어버려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특히 노인들이 자식에게 바라는 것이 너무 많아 가끔은 안쓰럽다.

이젠 제 갈 길 갔으니 행복하게 잘 살아주기만 바라면 그토록 가슴 쓰린 한 많은 세월을 살아가야 할 까닭도 없으련만, 그들은 쓸모없는 일에 그렇게 애를 태운다. 어느 할머니가 “우리 며느린 정말 착해요. 그런데 한 가지 흠이 있다면 음식을 못 해요.”라며 “아들은 내가 밥해 주면 밥 한 톨도 안 남기고 먹는데 잘 먹지 못해서인지 살도 빠지고 아주 속이 상해요.”라고 한다. 음식을 못 해도 남편을 위해 부엌에서 요리하는 그 모습만 보아도 예쁠 것 같은데 그것도 자식을 너무 사랑하는 부모의 마음이고 욕심일 것이다.
우리는 누가 만들어 주지 않아도 자신이 ‘한 많은 세월’을 만들어 갇혀 사는 것 같다. “우리 아들은 얼마나 똑똑한지 몰라요.” 그런데 회사에서 너무 똑똑하니까 부담이 되었는지 나가라고 해서 회사 그만두었어요. 고소할 방법은 없나요?”라는 노인의 말을 들으며 “그럼 그렇게 똑똑한 아들이 해결해야지 저한테 왜 그걸 물으세요?”라고 하자 “아들이 착해서 그런 짓은 못 하겠다고 하네요.”라고 한다. 세상에 너무 똑똑해서 해고를 당한다는 말이 있을 수 있을까?
내 것이 최고라는 말은 하지 말자. 내 것만 최고가 아니라 남의 것도 최상의 것이 될 수 있다. 내가 아름다운 사람이 될 수만 있다면 모든 것은 다 아름답게 보이겠지만, 내 마음이 아름답지 못하면 세상의 모든 것은 더러운 쓰레기로 밖에 보이지 않을 것이다. 선행은 못할지언정, 남의 마음에 상처를 주며 ‘한 많은 세월’을 만들 필요가 과연 있는 것일까?.

예진회 봉사센터 웹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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