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왜?

인간의 자아는 사람 개개인에 따라서 그 크기가 다른 것 같다. 인성과 지성은 인간이 나이가 들면서 같이 성숙하는데, 그 성숙 정도가 사람에 따라서 완벽하게 무르익은 사람, 중도에 성장중단한 사람, 나이에 상관없이 계속 성장하는 사람등, 천차만별이다. 당연히 나이가 지긋하시니 어느 정도의 성숙함을 기대하지만, 아직 초딩의 욕심을 보여주는 사람. 나이도 어린데, 벌써 나 스스로를 고개 수그리게 하는 성숙함을 보이는 사람. 정말 다양함에 항상 긴장을 늦출수가 없다. 그 결정적인 본성은 욕심의 크기에서 나타나는 것 같다. 욕심은 돈, 질투, 시기심으로 그 대상을 구체화 한다.

거리의 노숙자, 난민 망명자, 실직 구직자, 난치병 환자, 성폭행 피해자, 인종차별 피해자들은 모두에게 안스럽게 만드는 이웃들임에도, 아무리 교회에서 주변에 힘든 이웃을 도우라고 해도, 그렇지 않는 사람들이 더 많은 것이 우리 사회이다. 이는 그들이 불쌍하지 않고, 동정이 가지 않아서가 아니라, 근본적인 ‘벽’이 있기 때문이다. 이 ‘벽’은 나와 그들을 가르고 있고, 그들은 내 쪽으로 못오고, 나 또한 그쪽으로 갈일이 없기 때문이다. 그 ‘벽’은 이름이 있는데, 그것은 “내가 왜?” 이다.
“내가 왜 망명자가 돼?” “내가 왜 실직을 해?” “내가 왜 성폭행을 당해?”… 결국 이 벽으로 인해서 그들의 입장에서는 어떤 입장도 바라볼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긴 일생동안 장담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장담할수 없다’이다. 아무리 잘 나가는 연예인이라도 하루 아침에 손가락질 당하는 모욕, 잘 나가던 정치인이 패가망신, 잘 나가던 운동선수가 부상으로 선수생활 마감등… 정말 의외의 일들을 많이 목격할 수 있다.

내가 로또 1등에 당첨되는 확률보다 불행해질 수 있는 확률이 기하학적으로 더 높지만, 인간의 자아는 이를 직시하기를 거부하고 있다.
좁은 시각은 욕심으로 인해서 더 좁아져서 세상을 동전 크기의 창으로만 바라보려한다. 문제는 나의 좁은 창과 다른 사람의 좁은 창이 부딪치면 그 문제가 심각하게 야기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욕심의 근본이 되는 돈을 다루는 부동산업에 종사하다보니, 아주 간혹 이 충돌을 목격한다. 이 충돌은 블랙홀 직전의 슈퍼노바처럼, 주변의 모든 사람들에게도 그 영향을 미친다. 문제의 근원을 알면, 그 해결책은 아주 쉽다. 문제의 근원인 욕심을 버리면 모든 문제는 쉽게 해결된다. 그러나, 이때도 “내가 왜?”가 다시 고개를 쳐든다. “내가 아는 사람들은 다 이렇게 돈을 벌었는데, 내가 왜 그걸 안해요?”
비지니스에서, 정치에서 윤리가 찾기 힘들어진 이유도 “내가 왜?”가 이미 깊게 파고 들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하는 아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