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타고라스의 수업료

 

기원전 400여년쯤 고대 그리스에는 프로타고라스라는 유명한 철학자가 있었다. 그런데 그 오래전에도 교육은 공짜가 아니었는지 수업료가 없어 그 철학자를 맴도는 젊은 제자를 가엽게 여겨 외상으로 제자를 받았다. 그러니까 제자가 나중에 공부가 끝난 후에 그가 배운 논리로 재판에서 이기면 수업료를 지불하는 후불방식으로 제자를 받았다. 그런데 그 뒤가 나빴다. 수업을 마친 제자가 아무런 이유도 없이 프로타고라스에게 외상 수업료를 변제하지 않자 스승마저도 야박하게 제자를 재판에 세웠다.

 

 

재판이 있기전 스승인 프로타고라스가 제자에게 설전과도 같은 일갈을 한다 “너는 재판의 결과가 어찌되든지 그 결과와 상관없이 결국 수업료를 변제해야한다. 그 이유의 첫째는 스승인 내가 재판에 이기면 이겼기 때문에 그 이유로 너는 수업료를 내야하고, 둘째로는 설사 제자인 네가 이겼다하더라도 애초에 맺었던 우리들의 계약에 의해 즉, 첫 재판에 이기면 내기로 되어 있던 수업료를 내야하는 명시된 계약에 의해 네가 수업료를 변제해야한다” 이에 맞서는 제자의 논리도 혀를 찰 지경이다. 제자왈 재판의 결과와 상관없이 스승인 프로타고라스에게 어떠한 수업료를 낼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이유인 즉, 첫째로 제자인 자기가 스승에게 이기면 이겨서 낼 필요가 없고, 둘째로 진다면 스승에게서 배운 배움이 보잘 것 없음으로 수업의 고유의 목적이 실현되지 않아서 그러니까 애초의 스승과의 계약에 의해 지게되면 아니 내어도 좋다는 계약내용에 따라 낼 이유가 없다는 것이었다, 실로 그 스승의 그 제자이다, 이로 인해 프로타고라스는 큰 곤욕을 치러야 했다. 그의 이런 궤변논법이 서로 다른 해석에 따라 전혀 다른 결과를 낳을 수도 있는, 자기모순에 빠지는 논리적 오류를 갖고 있음을 지적한 이야기로서 훗날에 더 유명해졌다.

 

 

모순의 어원이 창과 방패인 것이 또 한 그렇듯 전혀 다른 문화권에서도 같은 상황을 지칭하는 경우가 catch-22이다. 이 표현은 1961년에 발표된 ‘Joseph Heller’의 소설 ‘Catch-22’에서 유래하였는데 여기서 catch는 ‘속임수’ 혹 ‘함정’을 뜻한다. 배경은 2차 세계대전의 막바지, 지중해 근처의 한 섬에 배치된 공군 기지에서 시작된다. 사령관이 자기부대의 실적을 위하여, 부하 조종사들의 출격 횟수를 터무니없이 늘려갔고 조종사들은 목숨을 건 이런 출격에 점점 지쳐간다. 출격하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자신의 정신적 결함을 증명해야 하는 것이었는데 의사의 판정없이 스스로가 미쳤음을 증명해야하는 이른바 당사자 직접요청권이 그 복무조항의 치명적 독소조항이었다.

 

 

복무조항 22조(clause of Catch-22)에 의거하여 스스로가 정신적 결함이 있음을 제기하면, 이는 곧 직접 요청을 한다는 것 자체가 스스로가 미치지 않았음을 반증하는 해석이기 때문에 그것은 더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결론에 이르러 결국 이 악질적 순환구조에 의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모순적 상황을 catch 22라는 말로 세상사람들에게 회자되었다. 철학적용어로는 <둥근 삼각형> 찾기인 셈이 될 것이다.

 

 

또 우리가 자주 듣는 “dilemma”라는 말도 있다. 여기서 ‘di-’는 둘을 뜻하고 ‘lemma’는 명제나 전제를 뜻한다. 그래서 적어도 두 개 이상의 방법이나 가능성이 있지만, 어느 것도 바람직하지 못한 결과가 나오게 되는 상황을 ‘dilemma’라고 하여 종종 궁지나 진퇴양난의 상황에 있을 때, 속된말로 ‘빼도 박도 못한다’고 하는 표현이 바로 그것이다.
실로 살면서 위의 논쟁은 매우 중요한 철학적 물음들을 함축하고 있기도하다. 우리에게 다가오는 상황이 그렇듯 그럴때는 기다림도 하나의 전술이며 미학이 되는 경우가 있으며, 물론 그것이 통하지 않는 급박한 상황도 있을 것이다. 정히 아니되면 아쉬운대로 우리의 직관과 본능에 의지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하루 동안에도 우리는 순간순간마다 수많은 판단을 내리며 선택하여 살아간다. 그런데 그 대부분의 판단은 직관 혹은 통찰과 유추에 속하며 필연성을 가진 논리적 추론은 오히려 적을 때가 더 많다. 이제 처음으로 돌아가보자 프로타고라스의 제자논쟁과 catch22의 경우에서 처럼 논리가 꼭 진리가 아니듯이 삼엄한 논리적 결론만 따르겠다고 작정한다면 우리는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을 것이 분명하다.

 

 

게다가 예술행위는 바로 이 ‘직관’에 호소하는 것이어서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는 성립할 수 없다. 그런면에서 우리는 하루하루 삶을 예술하고 있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며, 그것이 비록 모순적 상황일지라도 그렇다 그래서 이토록 삶은 지속될 것이나 계절이 바뀌면서 돌아보니 더 더욱 그렇다. 그걸 gut이라 일러도 좋고 미상불(未嘗不) 복심 (腹心)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