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의 길, 자족의 길, 그레이트 오션 워크 (6)

조금 열어놓은 문틈으로 아침햇살 대신 파도소리가 먼저 스며 들어옵니다. 지난밤 제법 얼큰하게 마신 술기운 탓에 그냥 소파에 잠들어 버렸더니 이렇게 자연의 소리로 아침을 열게 됩니다. 종주길이 이제 종반으로 접어드니 미지의 길을 나서는 초반의 그 흥분은 가라앉고 마음이 차분해져 있는 우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몸과 마음이 이제 걷는 것에 집중하고 자연 풍광에 완전히 동화되었습니다. 번다한 삶의 생각들을 내려놓고 그저 무심하고 경건한 마음으로 하루하루 주어진 몫의 삶을 살듯 오늘만큼의 걸음의 길로 한 발 한 발 들어가 묵묵히 걸어갑니다. 잡다한 영혼의 찌꺼기들이 걸러지니 머리가 맑고 가벼워지며 무상의 경지에도 접어드는 듯합니다.

 

걸음의 철학. 걷는다는 것은 도대체 무엇이기에 많은 선험자들이 이를 예찬하고 권유하고 나는 또 왜 이 걸음의 작업을 멈추지 않는가? 사람은 저마다 인생관과 가치관이 다르고 철학도 다르며 삶의 방식도 다르며 추구하는 방향도 다릅니다. 나에게는 걷는 작업이 내 삶을 이어주며 나의 존재 가치를 느끼게 해주기 때문이며 그 길위에서 느낀 그 당시의 진솔한 마음을 미천한 글로 남기며 만족하는 내 생의 장입니다. 언제나 트레킹의 여행에서 그렇듯이 평소 볼수 없는 독특하고 빼어난 자연 풍경속에 빠질 때면 그제서야 나의 존재감을 확인하고 삶의 의미를 다지게 됩니다.

 

 

오늘도 변함없이 바다와 숨바꼭질 하며 계속 이어지는 길은 오늘만큼은 지친 발을 위로하듯이 양탄자 같은 길을 내어줍니다. 흙과 모래가 쌓인 길에 풀잔디가 덮고 누웠으니 발을 닫는 촉감이 매우 순하고 부드럽습니다. 때로는 해안 절벽을 따라 이어진 길 옆에는 장쾌한 파도가 포말로 부서지고 하늘색에 비례한다는 똑같은 바다색의 푸르름이 깊어가고 점점이 떠있는 하얀 구름. 단순하면서도 강렬한 색의 향연입니다. 이제 우리들 키만큼의 크기로 자라있는 숲길로 들어서니 지난 몇군데 처럼 걷는 도중 보호 구역을 벗어나거나 진입할 때 신발을 닦는 시설이 몇 군데 설치되어 있습니다. 신발에 묻은 흙들을 솔에 대고 문질러 닦아낸 후 용수철 작용으로 내려앉는 발판을 밟으면 흘러나오는 세척액으로 소독을 하는 것인데 병원균을 다른 지역으로 옮겨가지 못하도록 해놓은 장치입니다. 시드니 인근의 부시 트레킹의 고향인 블루 마운틴 같은 유수한 명소에서 보듯 천혜의 자연을 보호하는 그들만의 방법입니다.

 

 

아름다운 해안 길은 언덕으로 이어지고 싱그러운 기류가 온누리에 은총처럼 가득하고 바람에 하늘대는 풀꽃들의 환대를 받으며 걸음의 희열을 이어갑니다. 동행들을 출발시키고 변함없이 오늘의 예정 종착지로 신나게 달리면서 오늘의 루트를 다시한번 그려보다가 문득 요한나 비치를 떠올리고선 황급히 와이파이가 터지는 지역에 차를 세우고 오늘의 해양 날씨를 검색해봅니다. 기겁을 하고 지금 이 시각이면 동행들이 다가올 정도의 지점으로 되돌아 갑니다. 잠시 후면 만조 시기가 시작되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