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쾌한 지리산의 능선을 달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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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 재우니 일찍 눈이 떠지는게 당연지사. 시차 극복도 안된지라 새벽 세시에 눈이 떠지고 뒤척이다 물버리려 뒷간으로 나서니 후두둑 처마에서 비가 떨어집니다. 우중산행인가 하는 염려로 황망하게 돌섶을 밟으니 비가 아니라 밤새 지붕으로 내린 이슬과 서리가 녹아 떨어지는 소리. 가슴을 쓸어내리고 대피소측에서 마련해 놓은 전광판을 보니 오늘 날씨 참 좋습니다. 세수하고 양치하고 응가하고 해도 여전히 새벽 4시. 스마트 폰을 붙잡고 밀린 글을 이렇게 써내려갑니다. 갈길이 먼 사람들은 어느새 라면을 끓여 후루룩 거리며 김을 모락모락 피우고 헤드램프 앞세우고 어둠을 헤치고 가는 이들도 있습니다. 조용하지만 저마다의 꿈과 목표로 힘차게 아침을 열어가는 노고단의 풍경입니다.

빵이랑 수프랑해서 간단하게 아침을 해결하고 벽소령을 향해 오늘 주어진 만큼의 길을 걸으러 갑니다. 짙은 숲에도 밤새 내린 서리로 비처럼 내리고 레인 자켙 빼내 입고 안개 자욱한 산길을 몸으로 털어내며 갑니다. 램프의 연기처럼 흩어지는 아침안개. 호젓한 길입니다. 한참을 걷다 문득 이제 땀이 나나 싶더니 게으르게 떠올라 어느 틈에 하늘 한 모서리에 환하게 웃고 있는 해가 그리했습니다. 점점 중천을 향해 차고 오르니 젖은 잎들이 마르면서 고운 풀잎빛이 선명해집니다. 어느샌가 우리들의 손에는 노오란 은행빛이 물들고 상기된 얼굴은 단풍빛에 물들어 갑니다.

임걸령 삼거리를 지나고 노루목을 지나면서 반야봉이 유혹하는데 지난 한라산 등정때 부상을 입은 이가 힘들어하며 너무 쳐지는 탓에 예상 시간을 초과하여 그냥 지나치고 말았습니다. 화개재를 넘어 연하천 대피소에 당도하니 거의 3시. 허기진 배를 햇반과 3분 카레 그리고 매운 라면을 끓여 가장 맛있는 점심을 나눕니다. 재건축을 하느라 먼지가 날리고 건축기기의 소음 등 어수선한 가운데서도 밥맛은 일품입니다. 나른한 피로가 몰려오지만 또 가야할 길이 많이 남아 있으니 자리를 털고 일어납니다.

벽소령 가는 길 3 km. 참으로 수려합니다. 기암들이 포진하고 괴석들이 도열한 길에는 마지막 빛을 발하는 잎새들의 너울거림이 정녕 최상의 가을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따금 펼쳐보이는 대 협곡의 장대함. 굽이굽이 물결치는 금빛 산마루의물결. 과연 민족의 명산 지리답습니다. 사흘전에는 설악에 첫눈이 내렸다는 보도를 들었고 오늘 아침 노고단 관리요원은 지금이 지리산 단풍이 절정이라 언급해 우리로 하여금 기대감에 부풀게 했었는데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1400미터 정도 기준으로 단풍이 절정이었고 그 이상은 제법 잎사귀들이 마르거나 이미 낙엽이 되어버렸고 그 이하로는 마지막 채색을 위해 맹렬히 준비하는 듯.. 오후의 가장 강렬한 해살에 비끼는 단풍의 빛갈은 낭자한 선홍의 피빛 같기도 하고 봄날 개나리 군락지의 만개를 보는 듯 노오랗게 번지고 있었습니다. 독야청정하리라는 사철 푸르른 노송들이 함께 하니 지리산 단풍의 진면목을 보여줍니다. 거벽 암반이 버티고 그 주위로 피어난 단풍꽃. 한폭의 미려하고도 수려한 동양 산수화가 아닐수 없습니다. 가는 길 명장면이 자꾸 발목을 잡으니 벽소령 도착 소요 8시간 예정 시간이 10시간으로 늘어나 버렸습니다. 뭐 그리 안타까울 일도 아닙니다. 산장에 일찍 들어 달콤한 휴식도 좋겠지만 이 아름다운 내 조국 금수강산의 산수를 희롱하는 기쁨과 자족이 이다지 큰데 말입니다.

길도 참 재미있습니다. 그저 쉴새없이 오르락내리락 거리게 하니 롤러코스터 타는 기분이고 돌계단 나무계단 정겹기만 하고 어떤 구간에는 로프타고 오르내려야 하니 전문 산악인이 된듯 우쭐해지기도 합니다. 부상자를 보살피며 벽소령에 당도하니 10시간이 넘게 걸린 6시가 되었습니다. 고산엔 밤이 일찍 찿아 오는 법. 이미 주변은 갑자기 어두워지고 단아한 대피소 외등에 불이 켜지면서 야외 식탁을 차지한 산객들이 저마다의 조명을 밝히고 취사에 분주합니다. 다양한 식단으로 냄새를 풍기니 후각으로만 먹은 음식이 십수가지입니다. 급기야는 스테이크 드릴테니 제육볶음 좀 주실래요? 하는 등의 물물교환이 이루어집니다. 산을 사랑하는 사람들만이 가질수 있는 넓고 열린 마음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죠. 바람은 없어도 쉴새없이 내리는 찬서리가 옷깃을 여미게 하지만 부지런히 오고가는 소주잔에 밤이 깊어가는 줄 모릅니다. 추억의 팝송을 틀어놓고 과거로의 여행도 하면서…. 유난히 가까이 다가온 하늘에 더욱더 밝아진 지리산의 별을 보다 스르르르 나도 몰래 몸도 마음도 허물어져버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