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연의 기억을 위해서

눈이 많이 내리는 겨울날을 보게 되면 나는 미시간의 겨울을 생각한다. 미국생활의 첫 걸음을 미시간에서 10년간 보냈기에 항상 가슴 한구석에 따뜻한 부분이 있다. 출근길의 눈길을 운전하면서 미시간의 향수를 생각하다보니 지나간 많은 인연들이 떠 올랐다. 좋은 인연들, 나쁜 인연들, 어색하게 끝난 인연들… 직장과 대학원의 인연들은 그 당시에는 매일 얼굴을 마주치던 절친한 인연들이었다. 그 당시에는 그 인연들이 영원히 계속 될 것처럼 느껴졌지만, 결국 그들의 이름 마저도 가물가물 해졌다. 나쁜 인연들은 다시 생각하면 화가 나고 혈압이 오를것 같지만, 시간이 그 감정을 둔화시켜서 이제는 그냥 미소 지을수 있게 되었다. 미시간을 다시 찾아봐야겠다고 늘 생각하지만, 지난 십여년동안 한번도 방문할 기회가 없었다.

그러다가 지난 가을에 갑자기 차를 몰고 다녀왔다. 감회가 새롭고 가슴이 벅찬 느낌이었다. 다시 가본 캠퍼스는 많이 변해서, 예전에 살았던 대학원 아파트 단지는 공원으로 조성 되었고, 새로운 건물들, 거리가 만들어 졌다. 유일하게 24시간 열어서, 책을 들고 자주 찾았던 도넛가게는 아직도 활기를 띄우고 있었다. 그러나 같이 지냈던 인연들은 대부분 이름도 기억나지 않았다. 연락이 안된지 20여년이 되어서, 가름거리는 봄날의 아지랭이 같다고나 할까. ‘그때는 참으로 열심히 올라가려고 노력했구나’라는 생각에 조금은 울컥거렸다.

사람들은 오늘에 충실하고 전적으로 의지하려고 한다. 지금 내게 부딪친 문제들이 내 인생에 가장 중요한 일이고, 지금 내가 만나는 인연들이 나에게 가장 영향적인 사람들이라고 느낀다. 오랫동안 부동산, 주택융자 관련의 일을 하다보니, 그 느낌이 더 절실하다. 부동산 매매와 주택융자는 시한부 과정이다. 주택매매 계약을 하고 세틀먼트를 하기까지 약30여일이 걸린다. 주택매매를 해본 사람들은 공감하겠지만, 이 30여일이 엄청난 긴장의 날들이 될수 있다. 사람살이가 다 그렇듯이 항상 예상치 못한 일들이 터지고, 그 문제들을 지혜롭게 헤쳐나가야하는 드라마 같은 30여일이다. 그 과정에서 피가 바짝바짝 마를때도 있고, ‘욱’하고 분이 치밀어 오를때도 있고, 어처구니 없다고 느낄때도 있다. 이런 30여일이 지나고 나면 비로서 세틀먼트의 결실을 맺는다. 아이를 직접 낳아보지 않아서 모르지만, 그때의 느낌이 마치 오랜 인고 끝에 아이를 낳는 느낌이 아닐까 생각되기고 한다.

그런데 다시 돌아보니, 그렇게 힘들게 성사시킨 거래의 기억도 결국은 미시간의 향수와 같아지는 것이다. ‘내가 그때는 그렇게 스트레스를 받았었구나’, ‘내가 그렇게 좋아했었구나’, ‘내가 그렇게 실망했었구나’등등… 어렸을때는 성과를 위해서 몸도 마음도 다 바쳐서 뛰었는데, 시간이 지나보니 성과는 결국 흔적도 없음을 알게 되었다. 그 사실을 인정이나 하려는 듯이, 미시간에서 최고의 세일즈 엔지니어로 받은 크리스탈 상패가 몇년전 워싱턴 지진으로 서재에서 떨어져서 박살이 났다. 그때의 느낌이 ‘내가 이 박살난 상패를 위해서 그토록 뛰었었구나’라고 미소 짓게 되었다.
나름 성숙했다고 믿고 싶어서, 사회 초년생때는 성과를 위해서 뛰었다면, 요즘은 좋은 인연을 위해서 뛴다. 성과에 목표를 둔다면 결국 과정의 기복이 클 경향이 있고, 그 과정내내 스트레스를 받는다. 그러나 좋은 인연과 여정에 목표를 두면, 그 여정내내 즐거움으로 변한다. 이제는 10여년이 지난 후에도 돌아보면서 좋은 기억만 남길 수 있도록 좋은 감정, 좋은 느낌, 좋은 시간을 만들어 가려고 노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