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인가 자식인가!

오랜만에 찾아온 어른에게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편찮으신 데는 없고요?”라고 묻자 노인이 껄껄 웃으며 “아직 땅 위에 서서 살고 있으니 별 탈은 없는 것 같네요.”라고 하였다. 처음엔 그게 무슨 말인가 몰랐는데 ‘죽으면 땅속에 있을 터인데 아직 살아있으니 땅 위에 있다.’는 뜻이었다. 살아 숨 쉬고 있으니 우리는 이렇게 다시 만날 수 있었고 안부를 물을 수 있었다. 그러나 요즘은 하루를 산다는 것이 ‘꿈 같다.’라고 할 수 있다. 매일 아무런 이유 없이 무참하게 생명을 잃는 사람을 볼 때마다 살아 숨 쉬는 오늘 하루가 신기할 뿐이다.

 

노인과 웃으며 만났지만, 어딘가 모르게 노인의 얼굴에 수심이 있었다. “무슨 걱정 있으세요?”라고 묻자 “언제부터인지 아내가 자꾸 저를 의심해서 못 살겠어요.”라고 한다. “아내가 뭘 의심해요? 왜 의심하는데요?”라고 하자 “나가서 친구 만나고 왔는데 누구 만나고 왔느냐고 의심하고 운동하고 왔더니 왜 그리 오래 있다 왔느냐고 의심하고, 꼬치꼬치 캐물어서 귀찮아요. 내가 나가서 여자 만나고 다니는 것도 아니고 내가 술을 마시는 것도 아니고 뭐 도박하러 다니는 것도 아닌데 너무 성가시게 물어서 귀찮아요.”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부인은 남편과 이혼하고 홀로 살다 지금의 남편을 만났고, 남편은 아내와 사별하고 홀로 살다 지금의 아내를 만나 재혼하여 산 세월이 어느덧 30년이 되었지만 둘 사이엔 자식이 없었다.

 

아내는 이미 전 남편과의 사이에서 딸 둘, 아들 하나를 낳았고 노인은 전 부인과의 사이에서 난 자식이 아들 한 명뿐이었다. 노인은 한국에 재산이 있었지만, 일찍 간 전 부인을 생각하여 그 재산을 하나뿐인 아들에게 물려주려고 정리하고 있었다. “혹시 그래서 날 의심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어요.”라며 “그렇다고 재산이 많은 것은 아니에요. 아파트 하나와 시골에 작은 땅이 있어요. ”라고 하였다. 아파트는 전 부인과 결혼해서 번 돈으로 장만한 것이고 땅은 부모에게 물려받은 것이었다. “제가 보기엔 자기 자식에게도 나누어 줄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라고 하였다.

 

물론 모든 명의는 노인 이름으로 되어 있었다. “나의 것은 그 어떤 것이라도 내가 주고 싶은 사람에게 주는 것이지 다른 사람 눈치 볼 이유는 없습니다.”라고 하자 “아내 아이들은 아버지가 있는데 내 재산을 그 아이들에게 나누어 주어야 할 이유가 없잖아요. 그런데 아마 그것 때문에 아내가 자꾸 내 뒤를 캐는 것 같아요.”라고 하였다. 이제 눈도 침침하고 귀도 어두워 재산 정리하려고 마음먹었건만, 그것 때문에 아내와 불화를 겪게 될 줄은 몰랐다. “아무리 생각해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라며 한숨을 내쉬는 노인은 “줄 수도 없고 안 줄 수도 없고 내가 아내 자식에게까지 재산을 물려줄 이유는 없는 것 같은데 이러다 잘못하면 아내와 이혼하게 생겼어요.”라고 하였다. 아들이 고등학교 다닐 때 암으로 먼저 간 아내, 엄마의 정과 사랑도 제대로 받지 못한 채 커가는 아들이 늘 마음에 걸렸고 아팠다. 이제 결혼하여 두 명의 자식을 낳고 사는 아들에게 죽기 전에 해 줄 것은 한국에 있는 아파트와 땅을 물려주는 것이었다.

 

그런데 생각하지도 않은 아내와의 불화가 찾아들었다. 아내는 자주 “한국에 있는 아파트하고 땅 빨리 정리하세요.”라고 하였다. 그러나 노인은 그냥 정리할 것이 아니라 아들에게 명의 이전해 주고 싶었다. 그리고 이제 그 일을 정리하려고 했을 때 아내가 “그냥 팔아서 돈으로 주지 뭘 복잡하게 명의 이전해 주려고 그러냐?”라며 시작한 것이 의심 아닌 의심을 불러일으킨 것 같았다. “전, 아들에게 주고 싶지 아내 자식에게 주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어요. 그런데 그렇게 하면 아내와 더 살 수 없을지도 모르는데 이 나이에 또 이혼하고 싶지도 않고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라고 나를 바라본다. 냉정하게 생각하면 그 재산은 노인의 것이기에 노인의 뜻대로 하는 것이 맞다. 그리고 아내는 그 재산에 눈독을 들여서는 안 된다. 그런데 아내는 오랜 세월 함께 한 부부이기에 그 재산에 욕심을 내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노인에게 해 주어야 할 대답은 없었다. 아들만 생각하자니 아내가 걸리고, 아내를 생각하자니 먼저 간 아내에게 미안할 뿐이었다. 노인은 “있어도 걱정, 없어도 걱정,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합니다.”라며 자리를 일어서는 노인의 등이 무겁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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