뫼비우스의 띠

어디에선가 한 번쯤은 들어본 말인데 얼른 그림으로 상상이 가지 않아도 좋다. 사실은 이렇다. 테이프 모양의 종이띠를 연결하되 중간에 한 번 은근히 비틀어 종이띠의 한 쪽 끝을 다른 쪽 끝에 붙여 만들어진 그런 모양의 띠다. 그러니까 종이밴드 중간에 한번의 비틀기가 들어 있다고 보면 틀리지 않다. 이를 일컫어 처음 발견한 독일 수학자의 이름을 따서 사람들은 뫼비우스의 띠라 부른다.
그런데 이 뫼비우스의 띠는 흥미롭게도 어느 한쪽면에서 색을 칠해 가다 보면 어느 순간 띠의 안과 밖 양쪽면 모두에 색을 칠하게되는 예상치 못한 현상이 벌어진다.

 

 

이는 분명 두개의 면으로 시작했지만 경계가 하나밖에 없는 2차원 곡면 도형, 즉 안과 밖을 넘나드는 무방향성이 되어 버린다는 것이다. 다시말해 개미 한마리가 뫼비우스의 띠 안쪽 면에서 시작하여 기어가면 나중에는 어느새 띠 바깥면에 나와 있고 바깥에서 시작하여 기어가면 다시 안쪽에서 다다르는 그런 모호성를 겪게 된다는 말이 된다.
게다가 그 뫼비우스의 띠를 따라 그러니까 종이밴드의 길이를 따라 가위로 잘라 나가게되면 두개의 동그라미 띠로 되는 것이 아니라 꼬였으나 길이가 두배로 늘어진 단일한 띠가 되어 마치 우주의 휘어진 공간이 흡사 말안장과 닮았다고 여기여 연상된다는 바로 그 뫼비우스의 띠다.

 

 

하도 현상이 재미있어 1865년 뫼비우스가 수학적 개념 정리를 한 후 문학이든 철학이든 반드시 내노라하는 석학들이 한번쯤은 이 개념의 허들을 넘어야 했다.
어떤 이는 이를테면 어려서 보았던 방앗간의 천장에 매달려 쇠바퀴에 감겨 있던 피대 그 동력 전달체인 피대의 경우로 설명하려 하기도 했다.
내용인 즉, 단순한 띠 모양의 피대가 아니라 한번 비틀어 그러니까 꽈서 쇠바퀴에 연결되어 그래서 뫼비우스의 띠 모양을 갖춘다면 그 피대 벨트는 벨트의 양쪽면이 고루 닳으면서 쇠바퀴로부터 잘 빠지지도 않는다는 경지, 좀 철학적으로 심한 경우 비약의 비약을 거듭하여 왕복운동의 진행조차도 비틀기의 모먼트를 경유하는 순간 가고 옴이 역전되고 하나가 되어, 헤어짐과 만남이 결국 같아지고 죽음과 삶조차도 넘나드는, 하나의 구별된 경계가 시나브르 무너지고 사그라드는 그 해괴함의 영역을 뫼비우스의 띠로 설명하려는 시도가 있기도 했다.

 

 

또 다른 예로는 흔히 롤로코스트라고 하는 놀이기구의 경우에도 출발점과 종점이 같아 중간에 여러번을 비틀어 꽈서 밑바닥이 위가 되고 다시 위가 아래로 되어 3차원에서도 2차원의 도형 그 안팎을 넘나드는 그 어이없는 괴팍을 감탄으로 설파하기도 했다.
그래서 70년대말 작가 조세희씨는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란 책에서 특유의 문학적 상상을 가미하여 가해자이며 피해자고 자살이면서 타살인 세상살이의 모습을 이 뫼비우스의 띠로 묘사하기도 했다.

 

 

물론 음양과 태극이 그런 것처럼 불교의 윤회와 연기설 역시 조심스러우나 그 맥이 서로 상통하는 바 적지 않을 것 같다. 그래도 그중에 내게는 압권인 것은 뫼비우스가 이 개념을 발표하기 대략 2400년 전에 이미 기록으로 남긴 장자의 호접몽이 될 것이다. 그러니까 장자가 어느날 꿈속에서 나비가 되어 훨훨 날아 다녔는데 문득 그 꿈에서 깨어나보니 원래 장자가 꿈을 꾸어 나비가 되었는지 아니면 꿈속의 나비가 장자가 되어 꿈에서 깨어난 건지 도대체 모호했다던 그 장자의 호접몽의 경계말이다.
그래! 여기서 멈추자 한발짝 더 나아가면 나 스스로도 영 이해가 자신없는 꼴이 된다. 이를테면 문턱없는 이승과 저승의 모호함, 손톱에 물든 봉숭아 물이 저승길 밝히는 변고가 되어 북경에서의 풍뎅이 날개짓이 네브라스카의 토네이도가 되는 황당함으로 까지 연결되어 정말 내 이해 영역 밖의 chaos이론이 되고 만다. 어째튼 생각의 골을 파다 보면 자신없는 대로 풀 한포기의 우주가 보일 수도 있는 건지 모를 일이다.

 

 

이제 하도 몽환적이라 머리로 이해가 아니되니 대충 감성으로라도 매듭을 지으려 한다. 모든 개는 자기 주인을 위해 짖고 우리 모두 자기 서러움으로 우는 법. 그러나 뫼비우스 띠의 그 비틀기를 지나는 순간 역전되고 전도되어 필경 그가 내가 되고 또 내가 그가 되어 넘나드는 안타까움으로 세상은 그런 것 일지도 모르겠다.
“이 풍진 세상에서” 아둔한 내가 봐도 좀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