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주 트레킹. 아. 장엄한 캐나디언 로키 4편

shutterstock_95719522-326x245미주 트레킹. 아. 장엄한 캐나디언 로키 4.

장엄한 빙하가 흐르는 SIX GLACIER

반프 국립공원지역의 하이킹 코스 중의 하나인 SIX GLACIER(빙하) 트레일을 오르는 날입니다. 여름에 밟아보게 될 만년 빙산이 상상하면 할수록 더욱 그리워지고 그 느닷없는 해후에 가슴 설레던 기나긴 밤을 보내고 까칠한 입맛을 토장국으로 달랜 뒤 보무도 당당하게 길을 나섰습니다. 금방이라도 비가 내릴 듯이 하늘은 낮게 드리워져 있었고 루이스 호수로 향하는 아이스필드 파크웨이 양편으로 스쳐 지나가는 캐슬 산이며 이름 모를 설봉들의 정상에는 자욱한 안개구름이 띠를 두르고 준엄하게 버티어 있습니다. 마를린 몬로가 출연한 ‘돌아오지 않는 강’의 촬영지로 유명한 보우 강이 그 특유의 에메랄드 색을 머금은 채 설산 사이로 한가로이 흐르고 물기 머금은 바람은 침엽수 무성한 들판을 넘어갑니다. 운무에 가린 로키의 산하는 수 억년을 그렇게 장엄하게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자연의 소리에 발맞춰 걷는 길

다시 보는 루이스 호수. 자욱한 안개 너머로 빅토리아 산의 신비로운 자태가 희미하게 비치고 무서우리만치 고요한 정적은 호수 주변을 감돌고 있었습니다. 워밍업을 위해 닦아놓은 호수변 길은 쾌적하게 평탄한데 주변을 돌아 후미로 가는 길은 아름다운 호수의 면면을 여유있게 다른 각도에서 감상하도록 해주었습니다. 간밤에 제법 내린 비로 개울이 범람하여 산행 길 일부는 유실되어 우회하도록 하였습니다. 6개의 빙하 산에서 녹아 흐르는 물들이 모여드는 곳에는 하천의 하류처럼 넓은 모래벌이 되어있었고 크고 작은 폭포랑 어우러져 여기저기 물 흐르는 소리가 음악처럼 들려옵니다. 이런 자연의 소리에 발맞춰 걷는 길은 경쾌하기만 합니다. 새소리도 풀벌레 소리도 함께 하니 자연이 시연하는 협주곡 같습니다. 초가을 이른 새벽 차마 떨치고 나오기 싫던 홑이불의 그 산뜻한 촉감처럼 로키의 기류는 온화하게 피부로 전해옵니다. 산기슭에 퍼져있는 노랗고 하얀 그리고 보라색으로 빛나는 들꽃들은 계절을 되돌아가 봄의 향연을 벌이는 양합니다. 아무리 조급한 걸음이어도 이 화사한 꽃의 풍성한 잔치를 외면할 수 없어 한숨 돌리며 쉬어갑니다. 그 소담스런 야생화들은 바람에 산들거리며 해맑은 얼굴로 우리의 대화에 함께 끼어듭니다.

사계절이 한 차원에 공존하는 천의 얼굴

이제 숨 가쁜 오르막길이 이어집니다. 간간히 보이던 활엽수조차도 자취를 감추고 잘 뻗은 침엽수만이 빽빽하게 들어차고 수십 년 수백 년을 그대로 누웠을 고사목들이 나둥그러져 있는 길을 지나갑니다. 직벽들이 도열한 좁은 길에는 기이한 암석들이 저마다의 모양으로 인고의 세월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비틀리고 휘어지면서 그 많은 세월을 버티어 온 장렬한 흔적입니다. 흔치않은 비경을 접하는 우리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밝게 빛나며 잔뜩 찌푸린 날씨와 대조를 이룹니다. 발길이 머무는 곳 마다 산길을 돌아가는 곳 마다 시선을 던지는 곳마다 로키의 표정은 사뭇 다릅니다. 봄날 연록의 풀빛이 가녀리고 짙은 녹음이 숲을 이루고 황량한 갈색의 마른 낙엽위로 바람은 소슬하고 눈보다 한 치 높은 거리로 다가온 설산엔 만년설이 자욱한 그야말로 사계절이 한 차원에 공존하는 천의 얼굴을 지닌 캐나디언 로키입니다. 아름드리 고송들이 울창한 삼림 속을 터널처럼 지나니 빛이 가려져 사방이 어두워집니다. 빙원이 가까우면 가까워질수록 발아래 펼쳐진 루이스 호수의 크기는 작아지며 그저 대형 화폭에 찍힌 한 방점처럼 변해갑니다. 에메랄드의 그 빛은 그대로 간직한 채로 말입니다. 등고선이 높아질수록 빙산 뒤에 숨었던 설봉들이 하나둘 새롭게 출현합니다. 주변 기류는 이제 소름이 돋을 만큼 스산해지고 채 녹지 않은 눈 더미 들이 때에 쩔은 모습으로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장난기가 동한 사람들은 눈더미 아래로 흐르는 개천 때문에 생긴 틈에 들어가 이글루속의 에스키모처럼 포즈를 취해봅니다. 이름하여 태고적부터 지금까지 그 자리에 있는 만년설입니다. 바위처럼 단단해진 빙하. 그 장구한 세월을 접촉하는 생경한 경험은 하나의 작은 충격이기도 합니다.

신선들이 즐겨 찾던 그런 곳

이어서 나타난 절벽으로 난길. 발아래 수 십길의 낭떠러지가 거의 수직으로 나있고 좁다란 길에는 안전로프가 연결되어 있어 조심스레 서로를 확인하며 건너갑니다. 험준한 고산준봉을 건너며 수행의 길을 마다않던 구도자의 심정으로 그 절벽 길을 넘어가니 고산지대의 특징처럼 수목들의 키가 작아지면서 정상도 가까워집니다. 저만치 소담스레 정좌한 산장이 눈에 들어옵니다. 일차 정상입니다. 한잔의 차가 그리운 갈증에 한걸음에 달려가 그 품에 안깁니다. 정원처럼 자연스럽게 꾸며진 넓은 메도우에는 온갖 풀과 꽃들이 무성하게 피어나 아름다운 화원을 만들고 여러 지류로 흐르는 도랑물 위로 세워진 조그만 다리들은 무릉도원의 그것과도 견줄만한 명경이 펼쳐져 있었습니다. 누각 같은 산장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나누는 한 잔의 차와 포도주는 이 세상 가장 귀하고 맛있는 액체임에 분명합니다. 눈 아래든 머리위에든 사방이든 허투루 봐 넘길 시시한 풍경이 분명 아닙니다. 아마 신선들이 즐겨 찾던 그런 곳이 아닌가 여겨지는 참으로 아름다운 곳입니다. 휴식을 끝내고 하산의 유혹을 떨쳐내며 최종 목표를 향해 길을 떠납니다. 산자락 하나를 넘어가니 이내 외길로 이어지는 능선이 정상으로 향하여 좁게 뻗어있습니다. 한사람만이 오를 수 있는 좁은 길을 길게 종대로 올라가는데 별안간 후두둑 소리와 함께 하늘에서 대두 알 만한 우박이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하늘을 치어다보는 얼굴을 내려치는 우박의 하중은 아리도록 세찬 아픔이었습니다. 신속하게 준비해간 방수 자켓을 꺼내 입고 길을 재촉하는데 비안개에 시야가 분명치 않아 물기 먹은 암석들이 발길에 채이며 낙상할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앞이며 뒷사람이 손에 닿을 만큼 가까이 하고 오르며 만일의 사태에 대비합니다.

산을 넘는 것이 아니라 내 자신을 넘는 순간

세찬 비바람이 맞바람으로 살을 에도록 불어오니 한걸음 한걸음 옮겨 딛기가 쉬운 작업이 아닙니다. 이정도의 환경에도 우리는 이리도 힘들어 하는데 에베레스트 같은 고산을 오르는 산인들은 얼마나 많은 고난을 극복해야 할 험준한 길인지 새삼 외경스런 마음이 듭니다. 우리도 이 힘겨운 등산길을 이제는 숙명처럼 받아들이며 올라갑니다. 산정을 향한 길을 한발 한발 또렷하게 내디디며 힘겹게 고난을 감내하며 오르는 길. 날씨마저 발길을 붙잡아도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산을 넘는 것이 아니라 내 자신을 넘는 순간입니다. 이 정도에서 하산할까 하는 방황 같은 흔들림. 표류하는 인생길처럼 혼미하고 주저하게 하는데 산은 포기하지 말고 자신을 정복해보라고 미더운 권고를 합니다.

신이 축성한 자연의 성. 참으로 장엄한 캐슬

그 육중한 지시를 받아들여 우리는 드디어 정상에 이르렀습니다. 그래서 또 다시 주어지는 선물, 산이 주는 포상. 정상에서 바라보는 세상천지의 아름다운 신의 피조물. 검푸른 절벽이 언제라도 덮칠 태세로 무섭게 머리위에 다가와 있고 수십 길의 빙하가 켜켜이 쌓여 내를 이루고 얼어붙은 구름은 움직일 줄 모르고 있었습니다. 장구한 세월을 지켜온 빙하는 엄숙하리만치 장엄하게 산정을 장식하고 우리는 탄식 같은 감탄으로 앓고 맙니다. 그 모진 산행길을 헤쳐 온 우리에게 산은 진정 이에 걸 맞는 포상을 해줍니다. 대 하천처럼 굽이쳐 흐르는 빙하는 넓은 계곡

을 하얀 눈과 얼음으로 가득 채웠고 금시라도 쩡하고 깨어져 무너져 내릴 것 같이 무서운 기세로 버티고 있었습니다. 기억속의 명장면을 회상하기 위한 매개로 열심히 사진들을 찍는 동안 어느새 서서히 걷히는 구름 아래로 신비의 빅토리아 산이 그 정상의 나신을 인색하게 드러내고 호위 군단처럼 위풍당당한 나머지 다섯 봉우리들도 그 위용을 드러내기 시작합니다. 신이 축성한 자연의 성. 참으로 장엄한 캐슬입니다. 추위마저도 잊고 빠져드는 황홀경에 시공을 초월한 영겁의 세월이 찰나 같은 순간이었음을 인지하게 됩니다. 1장 1막의 대자연이 베풀어준 연희는 끝이 나고 자애로운 햇살이 온 누리에 퍼져갑니다. 돌아서는 아쉬운 발길에는 빅토리아 산의 짙은 그늘이 조용히 내려앉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