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주 트레킹. 아. 장엄한 캐나디언 로키 3편

shutterstock_95719522-326x245미주 트레킹. 아. 장엄한 캐나디언 로키 3.

산마루를 잇는 하늘 길 Sulphur Mountain Skyline

캐나다 로키의 또 다른 심장부 제스퍼는 반프에서 직선거리로 2시간 차량운행이면 충분할 것을 길마다 드러내놓고 있는 로키의 비경을 차마 두고 갈 수 없어 지근거리에서 감상하기위해 정차하다 보니 여섯 시간이나 족히 걸렸습니다. 하향 길에 보기로 한 컬럼비아 빙원 방문을 건너뛰었는데도 말입니다. 지구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드라이브 코스로 정평이 나있는 이이스필트 파크웨이를 따라 북상하는 길은 신선이 구름타고 나르는 듯 다시 한번 일평생 소중한 기억으로 남을 만 했습니다. 시선이 머무는 곳마다 구도와 색감이 전혀 다른 각양각색의 풍경화가 진저리쳐지도록 아름답게 펼쳐집니다. 거대 암반과 녹색 목초지 코발트와 에메랄드빛의 호수들, 만년빙하와 흐린 날의 안개구름. 이렇게 다양한 소재로 빚어내는 조물주의 걸작은 지상 최고라 칭해도 손색이 없었습니다. 산모퉁이를 돌때마다 새롭게 펼쳐지는 대자연의 파노라마 같은 절경들이 기어코 발길을 잡아 그 웅대한 자연풍광을 가슴에 담고 로키의 신선한 바람을 깊이 호흡하면서 후각의 만족도 가미시켜봅니다. 안개구름이 산허리를 감싸고돌면서 보여주는 신비스런 시각적 효과는 만고의 성상을 변함없이 지켜온 설봉들에 휘둘려 머물 때 그 미의 극치를 이루게 합니다.

오늘은 제스퍼 인근에 있는 산행로 중 하이커들이 가장 즐겨 찾는 Sulphur Mountain Skyline 트레일을 오르기로 하고 일찌감치 길을 나섰습니다. 아마 캐나디언 로키 영역에서 수온이 가장 높고 수질이 제일 뛰어난 Miette 온천에서 산행로가 시작되는 연유로 그리들 좋아하지 않나 여겨봅니다. 어제 내린 풍성한 서설로 길섶마다 수북하게 눈이 쌓였고 이젠 만년설과의 경계도 없이 온산이 눈으로 뒤덮여 있습니다. 이 한 여름에 맞이한 상서로운 대설을 마음껏 즐기면서 산을 오르려 하니 마음이 들떠 차가 본의 아니게 가속도를 더합니다. 더욱이 오솔길을 산책 나왔다가 우리와 맞닥트려 부리나케 몸을 숨기며 도망치는 산 여우와 아기 곰의 엉덩이도 보니 산행외의 즐거움을 하나 더 얻은 셈입니다.

평화의 아늑함이 우리 인간사에도 가득하길

신발 끈을 동여매고 오늘의 험난한 여정을 시작합니다. 물기 머금은 산하는 더욱 푸르게 익어가고 있습니다. 길섶에는 잔설이 허허로운데 함초롬히 피어있는 산꽃들의 자태가 더욱 가련합니다. 짙은 주황색으로 타는 Paintbrush라는 꽃이 산행로 초입에 지천으로 피어 있습니다. 인디언들이 그 용맹성을 표현하기 위해 이 꽃잎 으깬 붉은 즙으로 얼굴에 치장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 정복자들에 의해 그리도 무참히 죽어가기 전까지는 인디언들도 저렇게 무수히 많은 페인브러쉬 꽃처럼 서로 어께를 기대어 살아왔을 것이라는 생각에 역사의 잔혹성에 대한 비감과 피지배자들에 대한 연민이 함께 교차되는 순간을 느낍니다. 눈을 다시 들어 주변을 보니 제법 여러 종류의 꽃들이 눈으로 채색된 바탕위에 예쁘게 장식하고 있었습니다. 캐나다 로키의 꽃들은 대개 8월 중순에 만개해 장관을 이루며 Meadow Wild Flower축제를 벌릴 정도인데 아직은 이른 7월 중순인데도 성급한 종들은 앞을 다투어 피어나고 있었습니다. 초롱꽃이며 산철쭉이며 그 외 다 이름 외우지 못한 다양한 꽃들이 영겁의 세월을 지켜온 자연물들과 조화를 이루어 공생하며 살아들 가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질서있는 평화의 아늑함이 우리 인간사에도 가득하길 간절한 기도로 가슴을 채웁니다. 호수 쪽으로 가는 길과 나뉘는 갈림길로 접어드니 이제는 제법 수북하게 쌓인 눈이 발길을 더디게 합니다. 하지만 벌써 이 산길을 다녀간 부지런한 이들이 있어 그들이 남긴 발자국을 따라 밟으며 감사한 마음으로 올라갑니다. 산마루 하나를 휘돌아 가니 옆으로 펼쳐지는 계곡. 우리의 궤적이 한 폭의 그림처럼 펼쳐지는데 어느새 발아래로 모여든 구름이 우리로 하여금 하늘에 둥둥 떠 있는 신선처럼 느끼게 만들었고 눈이 그친 하늘은 더욱 푸르고 가깝게만 여겨집니다. 풍덩 뛰어들어 멱을 감고픈 푸르디푸른 색감입니다. 켜켜이 누워있는 로키의 설봉들은 지난날 내린 서설에 뒤 덮여 그야말로 설국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아름다운 조화와 특이하고 오묘한 색깔은 감히 인간이나 문명의 이기조차도 표현해 내지 못할 신비스럽기 까지 한 걸작이었습니다. 생각난 듯 불어오는 바람은 오랜만에 펴보는 허리를 시원스레 만져주면서 행군의 통증을 잠시나마 잊게 해주는 고마운 친구입니다. 저 산마루를 쳐다보면 오늘 우리가 안겨야 할 설퍼산 정상의 스카이라인이 거대 직벽 위로 그어져 있습니다. 다시한번 도전의 투지를 보이며 홧팅을 외쳐봅니다. 그 소리는 대군의 함성으로 메아리로 반향되어 오니 충전된 첫발을 힘 있게 앞으로 내디딥니다.

마지막 넘어야 할 산은 자기 자신

쌓인 눈의 깊이가 더해 가면 갈수록 경사는 가파르게 이어지고 주변 수목들의 키가 작아집니다. 등고선이 그만큼 더 높아진다는 의미입니다. 더욱 가까워진 하늘위에 다시 떠오른 태양은 강렬한 광선을 내리쬐며 우리의 두상을 달구고 어느새 자켙 속으로 흐르는 땀줄기가 흥건하도록 굵어집니다. 옆에는 로키의 황홀경이 펼쳐져 있어도 지금은 만사가 귀찮고 힘들기만 합니다. 어서 저 머리위에 얄밉게 미소 짓고 있는 정상을 밟고만 싶어 가픈 숨을 몰아쉬며 전력을 다합니다. 아무리 동무들이 함께 하는 등산이지만 이 순간 저 정상을 향한 지금은 결국은 혼자 이루어야 하는 혼자만의 작업입니다.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는 등정 길. 우리의 인생길 같습니다. 설사 배낭을 나누어 짊어주고 손을 잡아 주어도 마지막 넘어야 할 산은 자기 자신입니다. 매일처럼 산을 다녀도 어느 산 하나도 호락호락한 산은 없습니다. 갈 때마다 고난과 고통은 매 한가지입니다. 산은 우리에게 그렇게 쉽게 정상을 내어주지는 않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산에서 그 극기의 미학을 과정으로 배웁니다. 인생을 깨우치는 것이죠. 끌어주고 당겨주면서 우리는 마침내 잔설이 자욱한 정상에 올랐습니다. 우리 곁으로 모여든 로키의 준봉과 설산들이 친근하게 웃어줍니다. 그간의 노고를 치하해주는 듯 구름도 잠시 머리위에서 쉬어들 갑니다. 속도가 더 붙은 바람은 귀밑머리를 매만지고 지나갑니다. 발아래로 구름은 가득하고 그 위로 이따금 산새들이 무리지어 흘러갑니다. 또 하나의 천국에 든 순간입니다. 항상 구름에 가려 정상을 잘 보여주지 않는다는 캐나디언 로키 지역에서 가장 높은 롭슨 산이 오늘만큼은 이 화창한 기류에 그 자태를 어렵사리 드러내 보이더니 흩어지는 구름에 신기루처럼 흔들립니다. 과연 명경중의 명경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말을 하지 않아도 우리가 이곳을 왜 그렇게 힘들게 올라 왔는지 그 답을 알기에 서로 미소만 주고받을 뿐입니다. 스스로에게도 대견스런 자부심에 초라한 오찬이지만 오히려 배가 부릅니다. 사방을 휘둘러 사진을 찍으며 휴식을 즐깁니다. 세상에 아무것도 부러울 것이 없는 순간입니다. 그 깊은 자족의 심연 속에서 눈감고 싶을 따름입니다.

락키의 천국 어느 모퉁이에서 겨울 같은 여름밤이

하산길에 만나는 다른 등산객들의 부러운 시선을 받으며 우리는 새털처럼 가벼운 걸음으로 내려갑니다. 어느새 산길은 눈이 녹아 물길이 되어 질펀합니다. 발자국 소리가 대군의 행군처럼 우렁찹니다. 이제는 다들 저 멀리 펼쳐지는 설국의 비경을 여유있게 감상하며 촌평을 한마디씩 하기도 합니다. 길섶에 가득한 산꽃들의 앙증스런 자태도 카메라에 담습니다. 누가 재촉하지도 바쁠 것도 없는 산행길입니다. 하산을 종료하는 지점에 우리의 목욕물을 데우기라도 하는 듯이 Miette 온천장에서는 뽀얀 수증기가 안개처럼 피어오르고 있습니다. 성급한 마음에 샤워하는 것도 잊어버리고 풀로 뛰어듭니다. 피로한 육신을 우리 체온보다 조금 높은 수온의 온천수에 담그고 지그시 눈을 감습니다. 발바닥부터 머리끝까지 전해오는 그 따스한 물의 좋은 느낌. 실눈을 하고 몸을 축 길게 늘어뜨립니다. 눈앞에선 서산으로 떨어지는 낙조의 보라색 향연이 벌어지고 등 뒤에는 설퍼산이 버티어 있고 좌우로는 눈들이 가득한 나지막한 산들이 둘러 서있으니 우리는 시중을 받으며 목욕을 즐기는 황제와 황후가 되어 산수를 희롱하는 것 같기만 합니다. 아늑한 휴식의 쾌감이 전신으로 퍼져갑니다. 도란도란 나누는 대화가 꿈결에서 들리는 듯 아득해지면서 슬며시 잠이 듭니다. 마침내 수은등이 하나 둘 켜지면서 이렇게 로키의 천국 어느 모퉁이에서 겨울 같은 여름밤이 조용히 익어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