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들을 얼려버린, 배우 아닌 인간 한석규

“질문 안 받아요~” 취재진을 폭소하게 만든, 동시에 당황케 한 그의 한 마디였다. 영화 ‘프리즌’을 통해 생애 첫 악역에 도전한 한석규가 특유의 맛깔스러운 입담과 진솔함으로 인터뷰를 ‘장악’했다. 천상 배우 한석규의 ‘배우론’ 아니 ‘인생론’은 취재진의 그 어떤 질문도 불필요할 정도로 솔직했고 심오했다. 뭉클한 울림을 가져다준 흔치 않은 광경이었다.

한동안 매섭게 불어오던 바람도 쉬이 지나간, 따뜻한 봄 날씨의 17일 점심,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그를 만났다. 워낙 인터뷰를 자주 하지 않는 배우라 소규모 라운드 인터뷰임에도 불구하고 10여명의 기자들이 모여 그와 이야기를 나눴다. 가벼운 인사를 건넸을 뿐인데, 그는 한껏 온화한 미소로 하늘을 한 번 쳐다 본 뒤 “연기가 아니었다면, 저는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었을까요? 제가 할 수 있는 게 있긴 할까요? 도무지 상상이 가질 않네요”라며 웃었다.

그러더니 “아, 연기 이전에 음악을 좋아하긴 했으니 노래를 불렀으려나?”라고 자문하며 자신의 학창시절에 대한 추억을 꺼내놓았다.

“중‧고등학교 때 노래를 주로 불러왔고 또 칭찬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노래를 부르는 일은 즐겁고 자신 있는 일이었어요. 내 안의 감정을 노래에 실어 표출하고 발표하는 그 기분이 참 좋았어요. 그런데 나중에 알아보니 돈이 좀 많이 든다고 해서…(웃음). 합창단 활동도 열심히 하고 성악도 배우고 하다 어느 날 고등학교 때 ‘지저스 오브 슈퍼스타’라는 록 뮤지컬을 보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전율을 느꼈어요. 그 때가 시작이었던 것 같아요. 배우의 길을 가게 된 것이.”

그는 최대한 당시의 감정을 생생하게 전달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다. 한 마디 한 마디, 기억 하나 하나에 정성을 기울이며 마침내 ‘예술적 경험’이라는 단어를 이야기 했다.

“청소년이었던 제겐 굉장하고 아주 짜릿한 충격, 생애 첫 예술적 경험이었어요. 그 여운이 너무 길어서, 이 엄청난 경험을 나도 누군가에게 보여주고 싶어서 그래서 배우가 되기로 결심했습니다. 뮤지컬 배우를 꿈꾸며 노래와 연기를 열심히 했지만 이런 저런 크고 작은 장애물들이 있었고 때론 연기 자체를 포기한 적도 있었어요. 심하게 부상을 당하기도 했고…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계속 걷고 걸어와 지금까지 배우로 살고 있네요.(웃음)”

인터뷰가 한참 지났는데도 도무지 ‘프리즌’에 관한 이야기는 나올 기미가 없었다. 통상 영화 홍보를 위한 자리 정도로만 여기는 다른 배우들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 이야기들이었다. 인터뷰에 참여하는 모든 기자들은 그의 이야기에 몰입했고, 급기야 “그런데 영화 이야기는 언제 해요?”라는 질문이 나와 한바탕 웃음이 쏟아졌다. 한석규는 해당 질문에 “지금 하려고 해요. 기다려봐요, 질문 안 받아요”라며 재치 있게 받아쳤고 다시금 폭소를 자아냈다.

그는 “내가 신인 감독들과의 작업을 선호하고 원하는 이유는 그들이 나를 안주하지 않고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도록 도와주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어 “젊고 새롭고 생명력 넘치는 그 기운을 너무 좋아한다”며 웃었다.

한석규 이번 영화로 생애 가장 악렬한 악역에 도전했다. 안주하지 않고 새로운 도전을 하기 위한, 또 한 걸음 본인이 추구하는 연기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거쳐 가야 하나의 과정이란다.

그는 ‘프리즌’ 속 자신의 역할에 대해 “교도소의 절대 제왕인 익호를 보고 딱 떠오른 게 하이에나였다”고 말했다. “다른 무리에 공격 당해 한 쪽 눈이 떨어져 나가고 한쪽 다리도 부상당해 굉장히 비참한 모습으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아 절룩거리며 기어나가는 수컷 하이에나를 봤던 기억이 딱 떠올랐다. 그게 내가 그린 ‘익호’의 이미지였다”고 설명했다.

“어떤 작품이든 캐릭터를 준비할 땐, 연기할 인물을 전혀 다른 나로 만들어 놓고 막 억지로 끼워 넣기 보단 그 인물이 가진 어떤 면 가운데 내게도 분명 있을 것들을 어떻게든 찾아내 입히는 작업을 해요. ‘익호’가 가지고 있는 악한 마음, 장악하려는 욕심도 사실은 누구나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가지고 있는 욕망이잖아요? 내 안의 깊은 곳에 익호와 맞닿아 있을 지점을 찾아 ‘상상력’이라는 조미료를 이용해 부풀리고 그렇게 나인 듯 나와 다른 인물을 완성시키는거죠. 결국 제가 연기했던 모든 인물들은 또 하나의 나이기도 합니다.”

끊임없는 시행착오, 실수와 좌절 등의 작업을 반복해가면서 스스로 원하는 연기에 할 발씩 다가간다는 그였다. “언젠가 만족할 순간이 올 것 같나?”라고 묻자 “영원히 못 할 것”이라며 다시 한 번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제가 생각하는 연기, 스스로 100% 만족하는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겠죠. 제가 끊임 없이 찾고 있는 이 과정의 해답은 영원히 못 찾을 것 같아요. 사실 해답은 중요하지 않잖아요? 그 해답을 찾기 위해 발버둥 치고, 완성하기 위해 계속 멈추지 않는 게 중요한거죠. 그렇게 이 일을 하고 살아가고 싶습니다.”

그는 그러면서 기자들을 향해 “자기 이익, 즉 일을 가지고 스스로 만족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자기가 작업한 일의 결과에 완벽하다고 평가하기엔 정말 말도 안 되니까”라며 반문했다.

“인생에도 매 순간 무엇이 더 중요한 지, 어떤 게 진정한 아름다운지를 자꾸만 잊어버리는 세상이에요. 저조차도 그래요. 그래서 ‘낭만닥터 김사부’ 같은 작품도 했고요. 많은 분들이 그런 지점을 계속 고민하고 잊지 않고 추구해나가다 보면, 우리는 달라지지 않을까요? 우리 세상도 조금은 달라지지 않을까 싶습니다.”

어느새 주어진 인터뷰 시간이 훌쩍 지났지만 그의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 누구 하나 지루해 하거나 불평하지 않고, 그의 이야기에 경청했다. 또 다른 그의 이야기가 시작 될 때쯤, “시간이 너무 지체되셨어요”라는 홍보 관계자의 말이 들려왔다. 매우 다급하고 불안에 가득찬 목소리였다.

모두가 훌쩍 흘러가버린 시간에 놀랐고, 한석규는 민망한 듯 고개를 떨구며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는 “안녕히가세요!”라고 외치며 벌떡 일어나 또 한 번 웃음을 자아냈다. 그리곤 자리를 나서는 기자들에게 일일이 다정하게 인사를 건넸다. 진정 처음 접하는, 배우 한석규여서 가능했던 그런 인터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