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만년 세월위로 걷는 길. 페리토 모레노 빙하 트레킹 (2)

주관하는 가이드의 장황하고도 반복되는 안전 수칙과 트레킹 요령을 듣고 우리는 굴비 엮듯 한 줄로 서서 빙하 위를 오릅니다. 수 만년 켜켜이 쌓인 세월 위를 걷는 것입니다. 앞선 가이드가 수도 없이 다녀 확연하게 난 길은 곡괭이 폴로 다듬으며 길을 개척하는 설정의 행동을 보여도 우리는 그저 추억을 담느라 바쁩니다. 그래도 정해진 구간만 걸어야 하는 이유가 곳곳에 끝을 알 수도 없는 깊고 깊은 크레바스가 입을 크게 벌리고 잡아먹을 듯 웅크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냉혹한 대지에 내린 눈이 녹고 얼음을 반복하면 만년설이 되고 그 눈이 더욱 치밀하게 다져지면 빙하가 된다 합니다. 수 만년을 녹고 얼다 칼을 퇴적시켜 놓은 듯 곳곳에는 위험하게 서슬 푸른 날을 세우고 도사리고 있습니다. 탄생과 소멸을 반복하며 그 생명의 고리를 연결해가는 푸른색이 감도는 빙하는 시리도록 투명하며 맑고도 맑아 골이 되어 흐르는 그 물을 가져간 잔으로 떠서 한잔 들이켜 봅니다. 소금기를 조금 포함하였지만 많은 광물질 덕에 텁텁하면서도 시원한 맛과 달싹한 맛도 함께 냅니다.

 

 

자연의 현상이 그렇듯이 모레노의 빙원에도 얼음은 녹아 물이 되고 수증기가 되고 다시 비가 되고 눈이 되어 빙하를 덮으면 태고의 정적이 쌓여 가면서 오늘을 이어왔을 것입니다. 페리토 모레노 빙하가 세계적 명성이 자자한 이유 중의 하나는 고고한 세월을 켜켜이 움켜쥐고 만들어낸 장엄한 규모로 그러하기도 하려니와 가장 가깝고 편하게 만날 수 있어 그러합니다. 바로 눈앞에서 어마어마한 굉음을 내며 무너져 내리는 그 빙하의 붕괴. 시간과 공간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수 만년 세월이 무너지는 것이기에 그렇게 포효하나 봅니다. 이렇게 무너지며 깨져버린 유빙은 하나의 조각품처럼 저마다 독특한 형상을 지닌 작은 섬이 되어 유유히 또 다른 세월 속으로 흘러갑니다.

 

 

이제 트레킹은 제법 비탈길도 오르고 언덕도 오르며 가쁜 숨을 쉬게 합니다. 오늘처럼 맑은 날은 그 강렬한 태양광이 부담스럽고 시력과 시신경 보호를 위해서도 반드시 자외선 광 보호안경을 써야합니다. 허물어진 이방의 낯선 아름다움. 산 꾼이라도 쉽사리 보지 못한 곳곳의 특별한 풍경에 시선이 가득 머뭅니다. 더 깊이 들어가고 더 가까워질수록 빙하는 더욱 정갈해지면서 그 독특한 매력을 풍깁니다. 마지막 지점에 도달하였습니다. 승객들을 실은 보트가 보이고 쪽빛 유빙들의 흐름이 한가로운 전망 좋은 자리에 작은 식탁이 놓였고 그 위에는 오늘 참가한 트레커 수만큼의 빙하얼음 넣은 술잔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위스키 온 더 록! 삼만 년 전의 시간을 맛보는 순간입니다. 상상할 수 없는 대자연의 맛을 느껴보는 것은 참으로 독특한 일이며 생경하지만 놓치고 싶지 않은 권주이기에 한잔 가득 부어 세월을 녹여 들이킵니다. 거미 망을 만들어 전율처럼 온몸에 퍼지는 짜릿한 취기는 내 몸을 가볍고 흥겨워지게 만들어 줍니다.

 

 

세상의 끝에 펼쳐진 얼음의 길. 시간의 무게와 눈의 압력에 의하여 빚어진 파타고니아의 세월이 빙하를 통하여 지상에서 설명하기 어려운 색을 띠고 신비하게 빛을 발합니다. 계절의 변화와 온도에 따라 결빙과 해빙을 반복하며 탄생했다 존재하며 또 소멸되어가는 그 모든 순간에서 자연만큼 더 경이로운 생이 또 있을까? 한갓 작은 생명체의 그 윤회도 그토록 오묘하거늘 생명도 없는 대 자연의 섭리는 감동 그 자체입니다. 이러한 깊은 감동을 주는 대자연을 보호하기 위해 우리에게 주어진 책무는 그저 사소한 것들이니 환경보호를 위한 수칙 하나라도 지켜주는 것이 우리와 더불어 후손들이 항구하게 즐길 수 있게 하는 길이 아닐까?!